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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민 시인 / 사과와 식탁
새가 식탁 위에 앉아 있다 다문 부리에서 파란(波瀾)이 흐르는 쭈글쭈글해지고 거뭇한 새가 있었다는 색을 지우면 공중이 된다 식탁 위에 사과가 놓여 있다 어두운 뿌리를 격발시켜 하늘이 되는 나무와 숲 바람을 피력(披瀝)하는 새가 날아와 사과를 쪼아 먹는다 목질의 무늬가 굽이쳐 솟는 반질반질한 표면 위로 수만 세기의 별들이 돋아 사라지는 식탁 사막의 모래는 바다로 변하고 식탁 위에서 사과가 날개를 편다 사과 위에 식탁이 놓여 있다 식탁이 사과를 으깨지 않는 것은 깊은 수심 때문 어디선가 망각의 지느러미를 펼쳐 새가 날아오기 때문 식탁이 사과의 문을 연다 사과가 새를 몸 안으로 품는다 사과 속 씨방에 까만 부리들이 눈 뜨고 식탁이 사과나무로 자란다 새가 주렁주렁 달린다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에서
서상민 시인 / 나비잠
당신의 일요일이 불안한 건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꽃에는 별다른 뜻이 없고 향기는 맥주 한 캔을 따기에 적당합니다 애인이 유리컵에 꽂아놓은 꽃에는 뿌리가 없군요 벌써 물빛이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당신은 뿌리를 만드느라 지쳤군요 나른한 오후의 잠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엉킨 비를 피해 방으로 들어온 나비가 말린 혀를 돌돌 뽑아 한나절 꽃을 빨고 있군요 당신의 요일들엔 다량의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거리에선 공사가 한창입니다 인부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 보도블록이 깔리고 꽃무늬 거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군요 뿌리 없이도 꽃은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잠들었군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치켜드느라 당신은 참 많은 최선을 소비했군요 만세와 항복의 자세는 늘 닮았습니다
서상민 시인 / 운동장의 표정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한 아이가 한 사내로 걸어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이 자란다 바람이 분다 먼지가 인다 운동장은 깊어지는 것이군 공은 찰 때마다 골대를 빗겨간다 공을 찾으러 그가 걷는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공을 잃어버린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빈 운동장에 남은 골대가 중얼거린다 이런 풍경을 어떤 슬픔이라고 부르긴 어렵고 슬픔은 구체적으로 얼굴을 가진 적 없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이제 곧 운동장에도 어떤 표정이 생긴다
서상민 시인 / 바닥
바닥 바닥 소리 내 봐 반쯤 열린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지 않니? 다시 한 번 바닥 바닥 되뇌어 봐 참 많은 혓바닥이 바위를 후려치는 바닷가 갯벌에 버려진 목선의 후미가 떠오를 거야 바닥 바닥 바닥이라고 한 백번쯤 써 봐 네가 써놓은 바닥들이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떼로 변할 거야 이제 바닥을 알겠니? 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는 고무공 같은 걸 상상했다면 넌 아직 바닥에서 먼 거야 바닥을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건 벽과 냉골을 떠돌던 사내들의 괴소문 같은 거거든 뭐가 뭔지 모르겠니? 온통 불안하니? 그럼 준비된 거야 고개를 들어 봐 모든 걸 바닥이게 한 유일한 바닥이 보이니? 바닥은 뻥 뚫린 동공이야 밑 빠진 하늘이야 때마침 바닥에서 비가 솟구치는구나! 너도 곧 바닥에서 타오르는 눈을 보게 될 거야 넌 바닥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매달린 거야 준비됐니? 손을 떼 이제 날 수 있을 거야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희 나비처럼>에서
서상민 시인 /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희 나비처럼
길고 흰 손 그 손가락으로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암막의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 한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비처럼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우연한 나비처럼 비상에는 이유가 없고 심장에는 향방이 없네 양들의 입술 위에 얹힌 나비처럼 믿고 싶은 거짓말처럼 검은 심장에 피가 도네 가면을 쓴 마술사의 눈을 피할 수 없네 눈이 내리네 눈썹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주르륵 눈물로 흩어지네 단 하나의 주문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마술사처럼 거짓말을 믿기 위해 날개를 다친 나비처럼 공연이 끝나고 마술사가 떠나네 흰 박수 소리 등 뒤에 파닥이네 죽은 나비들이 테이블 위에 쌓이네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희 나비처럼>에서
서상민 시인 / 장맛비 사십년 외길 강숙자 여사의 녹두빈대떡집 점포 앞에는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놓여있습니다 맛 없으면 돈 안 받습니다 순댓국과 밥도둑 게박사는 낮술에 흥근합니다 바닥에 쪼르르 세워놓은 빈 막걸리 통들을 발끝으로 감추고 탁자 위에는 딱 한 병만 마시자던 서울 장수 막걸리가 반쯤 남아 있습니다 수건을 둘러쓴 강숙자 여사의 이마에 떨어지는 짭조름한 땀방울이 기름에 튀어 노릇하게 익어가는 녹두빈데떡 가장자리가 바삭거립니다 가는 비가 추적추적 그칠 줄 모릅니다 셔터 내려진 싱싱 야채가게 좌판 위에는 일수 전단지 수북한 사이로 쪼그란든 감자들이 보라색 싹을 올리고 있습니다 맛 없으면 돈 안 받습니다 순댓국이 강숙자 여사에게 헤헤 웃음을 풀어 막걸리 한 사발 따라 줍니다 외상은 절대 안 된다는 여사의 일갈에 게박사의 오후가 움찔거립니다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 인간 안 잡아가고- 맞은편 게박사 여편네의 악다구니에도 서울 장수 막걸리는 여전히 반쯤 남아 있습니다 커다란 녹두 빈대떡 가득 담긴 접시를 서른셋 강숙자 여사의 딸 영선씨가 탁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막걸리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게박사가 영선이의 엉덩이를 힐끔거립니다 멈췄던 장대비가 후두둑 쏟아집니다 계간 『詩하늘』(2023년 여름호)
서상민 시인 / 완성되지 못한 시
축사가 보이는 저수지 뚝방에 앉아 담밸 피웠다 제비꽃 민들레꽃 함부로 제방을 넘어서고 수면에 손을 담근 버드나무 머릿결을 바람이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완성하지 못했거나 완성할 수 없는 시에 대해 얘기했다 메타세쿼이아 어린 나무들이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며 황토 위로 한철 그늘을 부풀리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영각 소리를 들으며 사랑의 완성은 이별일 거라 생각했다
카페에 제비꽃처럼 민들레꽃처럼 마주 앉아 커필 마셨다 아직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 없어서 노을 보는 걸 좋아했다 구름이 낮아진 날들을 예비하지 못한 채 저수지 표면에 떨어진 태양의 깃털들을 사랑했다 이별은 슬픈 거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마주보며 웃었다
다시 찾은 저수지 뚝방에 앉아 담밸 피웠다 돌 몇 개를 저수지에 던졌다 소 울음 같은 긴 파문은 이승에선 본 적 없는 무늬 같았다
잠들었으나 꿈이 오지 않았다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2022.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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