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신영조 시인 / 고요한 장독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0.
신영조 시인 / 고요한 장독

신영조 시인 / 고요한 장독

 

 

끓어 오릅니다 속이

하늘 땅 오가는 수 천년

내 속에 있는가 봅니다

시꺼멓게 앉아 있는가 봅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땅에도 숨지 못하고

바보처럼 우두커니

한통속에서

 

하늘과 땅,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삭이느라

땅을 끌어 안고

하늘을 바라보며

독은 지금 묵언 수행 중입니다

 

 


 

 

신영조 시인 / 강도둑

 

 

 천개의 조약돌이 구르는 시인의 시집을 여울에 가만히 적시어 손에 쥐고 그 시인이 숨 쉬는 물결의 소용돌이를 훔치려 두근두근 찢어질 수 없는 어망을 품고 강가로 나갔다네. 훔치는 것은 늘 두근거리는 은빛 물살이어서 가장 눈부신 죄 하나 꿈꾸며 죄수의 몸으로 더듬거 리네. 강은 밤에도 빛나는 도도한 소리의 향기. 은하수를 이루며 흘러가는 빛나는 악기를 손에 쥔 여인. 새벽별이 나즈막하니 충동질하는 손을 흔드네, 조약돌은 강의 살을 받아 부드럽고도 단단한 조직을 이루며 몸 웅크려 엿본 달빛의 흐름을 둥글게 바라보고 있었네. 훔치는 것이 이토록 기가 막히게 숨 막히는 줄 저 물살이 내 가슴으로 물길을 틀어막는 밤에 알겠네. 훔치는 것이 이토록 기가 막히게 두근대는 물살이란 걸 저 물살이 내 가슴으로 달려와 안기는 뜨거운 포옹으로 나는 알겠네. 강물 한 자루 그득하게 어깨 메고 돌아오는 밤. 물고기 한 마리, 자기도 남 몰래 훔쳐 가라고 고개를 내미네.

 

 


 

 

신영조 시인 / 모든 마을의 주소는 바람이다

 

 

 바람 속에는 유목민이 산다.

 

 유목민의 기타 줄이 텐트에 기대어 산다. 텐트 속 낡은 옷자락마을이 햇살 아래 나이를 먹는 오후가 산다. 오후가 허밍음으로 손을 내미는 저녁 속에 먼 바다가 산다. 표류하지 않으려 파도를 돛 삼아 마음을 반쯤 잠그는 섬이 노을 옆에 엎드려 산다. 이런 내력을 적시는 파도마을에서 흠씬 온 몸을 피리로 부는 노을이 고개 숙이며 산다. 고개 들어 나를 보라고 손 내미는 별마을이 바늘귀작은강 옆에 살그머니 산다.

 

 강물의 발목을 끌어당긴 별은 잊지 못하여 녹을 수 없는 눈길마을을 이루며 오래도록 산다. 차암 하얗게 헤어져 살다가 은하수는 제가 살아온 마을도 지우고 그 마을 속에 살아온 날들도 지운다. 마침내 제 몸도 지워버려 마침표로 생을 찍고 마는 모래마을 옆에 별똥별도 산다.

 

 이 모든 마을의 주소는 바람이다.

 

 


 

 

신영조 시인 / 소파를 사랑하는 아내

 

 

살아온 길이만큼 어울리게

소파는 아내와 닮았다

말이 없다

색깔도 둘 다 진하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다

 

앞과 뒤가 정확하다

남편의 월급보다 편하게 눕는다

남편이 바라보아도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다

 

아내가 편하다면

나는 결혼 잘한 거다 생각하지만

소파를 질투한다는 남편 소리를 듣기 싫어

점잖은 척 아내와 소파를 지긋이 응시할 뿐

 

나 혼자 잠자리에 들면서

나 혼자 중얼거리며 소파를 바라본다

 

소파는 나의 최대 적이다

내일 아침엔 너는 분리수거 될 것이다

 

아니 아니

 

소파의 길이만큼 생각해 보니

나의 일방적 사랑은 소파의 생각보다 짧았다

 

밤새도록

내가 분리수거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잔 마신 막걸리가 맹물이 되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신영조 시인 / 흔들

 

 

흔들, 생각이 납니다

아지랑이보다 긴 여운을 간직하는 것은

희미하게 내려갔다 올라오는 기억의 힘

 

아무도 모른다고 흔들, 고개 저어 봅니다만

그네를 보면 다시 흔들, 생각이 납니다

꽃 속에서 웃는 당신이 아지랑이 속으로 스며듭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봄꽃이 흔들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흔들, 노을이 그네를 탑니다

 

그네 속으로 스며든 아지랑이의 눈물이

눈앞에 뚝, 뚝 떨어지는 사람

흔들, 내 앞을 왔다갔다합니다

 

ㅡ 『시인시대』 (2022, 봄호)

 

 


 

 

신영조 시인 / 물 위의 바느질

 

 

저수지는 천 번의 눈물이 다녀간 발자국

은빛 연어가 환생한 각시풀 해종일 손 적시는 곳

물 위에 뜬 잎 상처로 남아 길 내는 주남 저수지*

오리바늘이 몸 흔들며 물의 상처를 깁고 있다

물의 몸을 잠그고 여는 저 새의 바느질

 

물속에 집이 있어 문을 두드리고

물속 마당을 발로 쓸고 있는 저 오리

물에 젖은 사랑을 쓸어 모을 적마다

물소리에 베이는 저 물의 밀어(密語)

젖을 때마다 한 번씩 보고 싶은 노을아

 

해가 누워 숨 고르는 저녁

너희는 타오르는 물속에 퍼질러 앉아

한 폭 깃으로 흠뻑 젖은 치마 둘러

물속 깊이깊이 벗어 놓아라

물속 멀리멀리 달아나거라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월잠리에 있음.

 

-시집 『눈물을 조각하여 허공에 걸어두다』에서

 

 


 

신영조 시인

1963년 대구에서 출생. 200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을 조각하여 허공에 걸어두다』 (서정시학, 2021년) 출간. 2016년 대구문협 올해의 작품상, 2023년 제2회 미래서정 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회원, 대구시인협회 회원.〈시가마〉회원, 효성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