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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덕 시인 / 모노드라마
바람이 분다. 이파리들의 날갯짓이 서럽다. 붉은 옷을 입은 나비들 날아간다.
빈 들판 위에 씌어지는 가난한 이름들. 숨 가쁜 나날들. 그렇게 잊혀버린 것들.
눈이 내린다. 들판을 덮고 있는 것들 그것들의 이름, 천천히 불러본다. 묵직하게 흘러내리는 것들.
오선덕 시인 / 발톱
발톱을 숨기고 있다. 언제 발톱 쫙 펴고 포식의 순간을 낚아챌는지 모른다.
풀어헤친 긴 검은 머리카락, 허공을 메운 날개깃,
숨을 죽이며 몰려오는 태양의 포식자가 회색빛 도시의 정수리 위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고 있다.
너덜너덜 찢긴 심장의 고동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의 광시곡, 다 쏟아낸 어느 날 오후,
포식자의 날카로운 발톱, 끝내 뜨거운 가마솥뚜껑 안으로 숨는다.
오선덕 시인 / 카테리니행 기차
기차는 끝을 알 수 없는 검붉은 선로 위를 달린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재생되지 않는 기억처럼 흔들리는 가수의 목소리 깊은 터널 속으로 밀어 넣는다
가로등 불빛이 기차를 따라 떠나간 곳,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작은 성냥갑의 따스한 온기, 깊은 잠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던 무릎 위의 자장가, 일렁이는 모닥불 사이로 삼킬 듯 밀려오던 파도 소리
어떤 소리도 잠재울 것 같던 기적 소리가 스쳐 간다
말속에 숨은 활자들이 책들로 엮어져 간다 기약 없는 페이지를 넘기며 맨 뒤에 그냥 끝이라고 쓴다
-시집 『만약에라는 말』에서
오선덕 시인 / 소나기
발톱을 숨기며 달려온다 언제 쫙 펴고 포식의 순간을 낚아챌지 모른다
독수리처럼 푸른허공 속으로 날아오르는 검은날갯짓
숨죽이며 다가오는 태양의 포식자 정수리 위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인다
너덜너덜 찢긴 심장의 고동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의 광시곡, 다 쏟아낸 어느날 오후
소나기는 뜨거운 가마솥뚜껑 속으로 숨는다
오선덕 시인 / 버릴건디 버릴 건디
숨차게 뛰어다녔던 마당, 그 끝자락 작은 고추밭, 아궁이에 불을 지필 쯤이면 고추 몇 개 따 오라는 말 듣기 싫어 아랫목 이불 속으로 숨었다
이제는 좁은 마루위, 고춧잎이 바구니 한가득 담겨 있다
자식 주려고 따놓은 고춧잎, 쟁여진 시간만큼 마르고 물러져 차마 버리지 못하는것들
마당에서 올케와 시누이가 마주앉아 한잎씩 다듬을 때
팔순 노모는 주위를 뱅뱅 돌며 버릴 건디 버릴건디 염불을 왼다
-시집 <만약에라는 말>에서
오선덕 시인 / 움막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사람들은 맞은편 건물 계단에 늘어서 있다 빗속에서 는 왜 옷의 색깔이 모두 비슷해 보일까
창문과 커튼 사이처럼 당신과의 거리가 애매해졌다 며칠 전 본 당신의 흑백 영정사진은 명함판을 확대한듯 희미했다
당신이 살아온 비닐하우스엔 창문도 커튼도 없었다 지붕을 송두리째 뒤덮던 눈, 들판의 거친 흙먼지와 땡볕, 수도도 없이 계절을 보내던 당신, 나는 몇 통의 물과 과일을 주고받곤 했다
희미한 사진 속 그녀는 오래전 유행했을 꽃분홍한복을 입고 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환한 미소를 띠고 있 었다
오선덕 시인 / 버릴건디 버릴 건디
숨차게 뛰어다녔던 마당, 그 끝자락 작은고추밭, 아궁이에 불을 지필 쯤이면 고추 몇 개 따 오라는 말 듣기 싫 어 아랫목 이불 속으로 숨었다
이제는 좁은 마루위, 고춧잎이 바구니 한가득 담겨 있다
자식 주려고 따 놓은 고춧잎, 쟁여진 시간만큼 마르고 물러져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들
마당에서 올케와 시누이가 마주앉아 한 잎씩 다듬을 때
팔순노모는 주위를 뱅뱅 돌며 버릴 건디 버릴 건디 염불을 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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