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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소 시인 / 시골 사는 법
아내는 춘천에 있고 아들은 서울에 있고 딸은 무주에 있고 나는 시골에 있다
아직 시골 사는 법을 몰라 앞문으로 나갔다 뒷문으로 들어오고 뒷문으로 나갔다 앞문으로 들어오는 일만 반복한다
북두칠성, 내가 아는 유일한 별이다
-시집 <아내의 수사법> 에서
권혁소 시인 / 곰배령
점봉산 가는 길 오늘은 곰배령까지만 간다 거기 지천으로 피었다 동자꽃 동자꽃 안주하여 술 한잔 마신다 나도 마시고 안개도 마신다 물봉선도 취하고 노루귀도 취하고 바람꽃도 취한다 묻는다, 세상은 왜 감탄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냐고 없는 것이냐고
마을로 내려와 안개를 토했다
-《한겨레 신문》 (2006년 9월)
권혁소 시인 / 아내의 수사법
겨울을 살아 낸 나무들이 새순을 틔워내는 것을 보면서 아내는 나무들이 길을 잃지 않으려고 가지 끝마다 연둣빛 등불을 하나씩 단 것 같다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했다
가지 끝마다 연둣빛 알전구 하나씩을 매단 세상을 희망으로 부풀게 하는 전령들이 성장판이 자라는 고통을 딛고 한 해 한 눈금씩 제 키를 키운다
아내가 시를 낭송하고 나는 그것을 종이 위에 적는다 아내의 수사가 봄을 환히 밝힌다
권혁소 시인 / 국수 -이상국 시인께
하루 한 끼 국수를 주는 곳이라면 감옥 빼곤 다 갈 수 있는데 독자들은 국수, 하면 이상국 시인만 떠올린다
나도 60년 가까이 국수를 먹었다
시인의 '국수'처럼 팔리지 않아 그렇지 국수에 대한 추억 몇몇 시로 쓴 적도 있으니 이제라도 독자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국숫발처럼 비는 내리고 불현듯 국수를 먹고 싶은데 공연히 이런 생각이 나서 국숫집 대신 시를 쓰는 중이다
이상국 시인께 전화를 넣었다 정작 국수 얘긴 꺼내지도 못하고 국수와 공 정부가 무슨 상관일까만 이러다 나라 망할 것 같다는 얘기만 했다
김만배 누나가 이상국 시인의 안 팔리는 옛집도 좀 사줬으면 좋겠다
권혁소 시인 / 껍데기의 나라를 떠나는 너희들에게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게 바침
어쩌면 너희들은 실종 27일,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수장되었다가 처참한 시신으로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열일곱 김주열인지도 몰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일이었다
어쩌면 너희들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에서 머리채를 잡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욕조 물고문으로 죽어간 박종철인지도 몰라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일이었다
너희들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고향은 쥐라기 공룡들이 살았던 태백이나 정선 어디 탄광 노동자였던 단란한 너희 가족을 도시 공단의 노동자로 내몬 것은 석탄산업합리화를 앞세운 노태우 정권이었다
나는 그때 꼭 지금 너희들의 나이였던 엄마 아빠와 함께 늘어가는 친구들의 빈 자리를 아프게 바라보며 탄가루 날리는 교정에서 4월의 노래를 불렀다 꽃은 피고 있었지만 우울하고 쓸쓸한 날들이었다
여객선 운행 나이를 서른 살로 연장하여 일본에서 청춘을 보낸 낡은 배를 사도록 하고 영세 선박회사와 소규모 어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엉터리 안전 점검에 대기업들이 묻어가도록 하고 4대강 물장난으로 강산을 죽인 것은 이명박 정권이었다
차마 목 놓아 부를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이들아
너희들이 강남에 사는 부모를 뒀어도 이렇게 구조가 더뎠을까 너희들 중 누군가가 정승집 아들이거나 딸이었어도 제발 좀 살려달라는 목멘 호소를 종북이라 했을까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절규하는 엄마를 전문 시위꾼이라 했을까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막말 배틀을 하는 나라 너희들의 삶과 죽음을 단지 기념사진으로나 남기는 나라 아니다, 이미 국가가 아니다 팔걸이 의자에 앉아 왕사발 라면을 아가리에 쳐 넣는 자가 교육부 장관인 나라 계란도 안 넣은 라면을 먹었다며 안타까워하는 자가 이 나라 조타실의 대변인인 나라 아니다, 너희들을 주인공으로 받드는 그런 국가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박근혜 정부의 무능에 의한 타살이다 이윤만이 미덕인 자본과 공권력에 의한 협살이다
너희들이 제주를 향해 떠나던 날 이 나라 국가정보원장과 대통령은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머리를 조아렸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래서였나 그래서 세월호의 파이를 이리 키우고 싶었던 걸까 아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이제 막 피어나는 4월의 봄꽃들아
너희들의 열일곱 해는 단 한 번도 천국인 적이 없었구나 야자에 보충에 학원에, 바위처럼 무거운 삶이었구나 3박 4일 학교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흥분했었을 아이들아 선생님 몰래 신발에 치약을 짜 넣거나 잠든 친구의 얼굴에 우스운 낙서를 하고 베개 싸움을 하다가 선생님 잠이 안 와요, 삼십 분만 더 놀다 자면 안 돼요 어여쁜 얼굴로 칭얼거리며 열일곱 봄 추억을 만들었을 사랑하는 우리의 아이들아 너희들 마지막 희망의 문자를 가슴에 새긴다 학생증을 움켜쥔 그 멍든 손가락을 심장에 심는다
이제 모래 위에 지은 나라를 떠나는 아이들아 거기엔 춥고 어두운 바다도 없을 거야 거기엔 엎드려 잔다고 야단치는 선생님도 없을 거야 거기엔 네 성적에 잠이 오냐고 호통 치는 대학도 없을 거야 거기엔 입시도 야자도 보충도 없을 거야 거기엔 채증에는 민첩하나 구조에는 서툰 경찰도 없을 거야 거기엔 구조보다 문책을, 사과보다 호통을 우선 하는 대통령도 없을 거야 어여쁜 너희들이 서둘러 길 떠나는 거기는 거기는 하루, 한 달, 아니 일생이 골든타임인 그런 나라일 거야
따뜻한 가슴으로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이들아 껍데기뿐인 이 나라를 떠나는 아이들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눈물만이 우리들의 마지막 인사여서 참말 미안하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
권혁소 시인 / 늙은 개
나에게로 와서 늙은 개 한 마리 있다
도시의 낯설고 후미진 골목을 배회하다가 어린 손주를 두고 황망히 길 떠난 엄니 대신 왔을까 딱 하루만, 단서를 달고 너는 우연처럼 왔다
딱 하루가 십오 년을 넘는 사이 이빨도 귀도 눈도 어두워진 늙은 개
안위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 손으로 슬쩍 건드려야만 천천히 고개 들어 나 아직 살아 있다고 몸짓하는, 오직 후각 하나로 삶을 지탱하는 개
정치인 욕할 때 개만도 못 한 놈이라 했던 말을 사과한다 하여 턱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어떤 헌사 같은 것 집을 비우는 아침마다 주문을 반복하게 하는 늙은 개 네 나이를 사람 나이로 환산하여 측은해 하지 않으리
나에게로 와서 함께 늙어가는 개 한 마리 나의 목덜미도 어루만져다오, 나 죽거든
권혁소 시인 / 지는 사랑
낡아보니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만큼만 사랑을 할 뿐 그런 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헤엄치기를 마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대에게야 말해 뭣 하겠는가
사랑을 잃고 시를 얻다니, 이런 행위가 삶을 경외하는 마지막 자세라고 슬픈 자위를 해보긴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휘파람을 불어주는 일도 버겁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 저문다 숨자, 어느 숲에든 몰래 들어가 조용한 바람에도 격하게 이파리를 떠는 관목(灌木)이라고 되자, 그대와 나 비록 실패하는 사랑에 매진했으나 아직 세상엔 못다 한 사랑이 많이 남았으니 사랑이 진다고 싸움을 부를 일만은 아니다 저무는 일, 때로 고요할 따름이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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