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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범 시인 / 단색화
시간이 만들어낸 공력, 시간이 만들어낸 공력, 평면에서 잃었던 촉감을 소환한다.
무명성無明性, 할 말은 많으나 은폐하고 덮어서 비워야 한다.
기왕의 색을 비우면 내면의 색이 드러나고 마음을 구우면 참나의 숨결이 살아나고 더께 낀 아상은 사라진다.
비움으로 빛을 채우는 색의 적요寂寥, 층을 이루고 공간을 이룬 속세를 깍아내 치성을 바치는 몸 공貢이다.
네가 거쳐간 흔적들 켜켜이 쌓인 곳에 만상에서 색을 비우고 순례를 떠나야 한다.
정규범 시인 / 모시
느리면 거칠고 빠르면 연하다 적기에 베어야 한다
가죽을 벗겨 물속에 숨을 죽이고 일광에 화를 녹이고 바람에 결을 누이고 저 생의 흙을 벗긴다
너의 심줄을 만들고 이생에 핏줄을 내기 위해 이로 째고 무릎으로 감으면 나의 혀끝은 갈라지고 베이며 나의 이는 조각나야 했다
무릎 살갗에 줄이 패이고 그 줄 위에 너의 줄을 감는 나의 온몸은 너를 낳기 위한 도구이다
최적의 습도에 신전을 차려 가로 올 세로 올로 온기와 결을 나눠 사랑을 채워 너의 영토를 넓혀간다
자연과 인간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장인의 땀과 혼 젊은 대기로 쉼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사랑, 너를 만나 이생을 건너면
풀은 풀이 아니고, 몸은 몸이 아니고, 결은 결이 아니고,
모시, 너 하나가 된다
정규범 시인 / 봄, 옹알이
샛강 버들이 솜털을 털어 겨울잠 깨우니 대기는 솜털의 떨림에 떠밀리고 산야의 표피는 대기의 입김에 말랑해진다 겨우내 땅의 뿌리가 물의 뿌리인 서릿발에 오르내릴 때마다 시소 타듯 오금 지리며 제 뿌리를 덩달아 오르내렸던 청보리도 푸른 옷고름을 살며시 헤치며 속이 무사한지 살펴본다
동박새가 나목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오가며 대기를 덥히고 이으면 나무들은 핏줄 돌려가며 정신을 챙겨와 동면기에 감춰뒀던 여린 눈을 끔뻑여본다
평생 동안 흙을 만지고 구우며 조각한 어머니의 거룩한 손은 가슴팍이 허물도록 나이 든 아들을 보듬어 또다시 봄빛으로 조각한다
복수초, 홍매 그리고 외양간 소 등을 타고 온 봄의 정령들은 봄의 선발대로 소환된 소임을 다하느라 땅속의 봄 향기를 지상으로 컹컹대며 연신 뱉어낸다
터질 듯 탱탱한 봄의 젖멍울은 화사하게 부풀고 산짐승의 가죽은 봄 햇살에 느슨한 하품을 품어내고 봄 향기를 흡수하는 하늘과 땅도 덩달아 착해진다
인간들의 가학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던 자연이 깨어나 자신을 치유하며 봄의 성찬을 지상으로 베풀어낼 때 자연, 그 어머니의 무너졌던 폐허는 인간들에겐 망각의 섬이 된다 봄의 자궁 속을 탐닉하기에 여념이 없는 인간은 또다시 불효자로서 단물만 빨고 있다
-시집 <길이 흐르면 산을 만나 경전이 된다>에서
정규범 시인 / 붓
햇살,뜨거운 유필遺筆로 흐르는 너의 정원에서 바람은 무엇을 뒤적이고 있는가? 감각하는 것들에게만 마음 싣는 이는 햇살과 바람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너는 언어를 벼리고 깎아서 피로써 성탑을 쌓으려는 자, 사이와 사이에는 참 많은 사이가 있듯 너와 사유 사이에는 참 많은 언어가 있다. 하늘과 땅은 너와 함께 태어났으나 너 이전의 하늘과 땅은 이름이 없는 것 공간을 나누어 공유하는 우주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 하늘과 땅 사이에서, 너와 나 사이 참 많은 사이에서, 심상의 뜨락을 키우며 쟁기를 종이 벽에 박아 문자의 땅 갈아 영혼 맑게 새겨야 하는 너의 심지
정규범 시인 / 말言의 독법讀法
하늘의 천 뚫리고 물은 실핏줄로 터지고 말은 쓰러지고 그리움은 파랗게 물든다. 도시는 아직도 마른 공기로 들끓고 묻어온 소음은 납처럼 달라붙어 끈적인다. 심장소리는 빗소리를 섞어 말을 덮고 말을 향한 질문은 배꼽을 타고 태초로 향한다. 심장 속에서 마음이 열린 날 보고 싶다는 말,쓰레기로 허공에 빨려든다. 바람만이 잎의 속살을 뒤집어 말하는 게 아니었다. 빗방울의 뜨거움도 잎의 속살을 더 푸르게 말할 줄 안다. 작은 그릇에서 큰 그릇이 나올 수 없고 큰 그릇에서는 작은 그릇이 나옴을 말하고 있다. 말에 입힌 시는 몸에 기댄 영혼, 말과 몸은 서로를 잘 받아야 한다. 몸은 늘 말의 배설을 통하여 살고 바람과 별빛이 한밤에 새겨둔 글자는 말 그릇에 담을 수 없고 말로 읽을 수 없다. 투명한 햇살이 비치는 나뭇잎의 발음으로 천상의 기록과 땅의 기록을 함께 새기며 흐르는 것이 말의 음계다. 말에 담긴 무늬는 자연의 가슴을 몸에 덧씌울 때 또렷이 나타난다.
정규범 시인 / 푸른 나무도서관에서 줍는 소리들
책이 좋아 흙 속에서 푸른 나무 도서관으로 나왔어요. 가는 발가락을 가늘게 더듬어 책장을 넘겨 가요. 책을 읽고 소리를 얻으면 숲에는 소리가 가득해져요. 고막을 찌르는 고성은 난독으로 잘못 얻은 소리여요. 음을 추려 정음으로 묶으면 묵음도 잘 해석돼요. 하고 싶은 말이 간절해질 때 소리는 침묵해요. 허물을 벗고 남긴 허상은 나무의 영역입니다. 울음을 폐관한 자리에서는 공기가 소리를 켜고 있어요. 풍경의 사진은 소리를 담는 음반이 될 수 없어요. 땅속 칠 년의 길이라서 소리의 음역은 길 수밖에 없거든요. 당신은 저 소리를 이생의 철필로 잘 녹음하고 있나요? 당신이 편집하는 소리를 짐작해 봅니다. 소음 가득한 서고에서 걸러진 맑은소리가 당신처럼 내게 오고 절실함으로 건너는 내 소리는 당신의 음역으로 스며들고 싶어집니다. 내 소리도 당신의 한 소절로 담길 수 있을까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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