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영조 시인 / 등긁게 외 1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9.
고영조 시인 / 등긁게

고영조 시인 / 등긁게

 

 

쌍계사 민박집에서

치과의사 김묵세가 등긁게를 사서

 

옷 위에 쓱쓱

등을 긁어 보였다

 

오! 저렇게 닿을 수 없는 뒤가 있고

닿지 않는 몸이 있다니!

 

다른 손으로 긁어야 할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우리에게 있다니

 

-시집 <고요한 숲> 1995년 고려원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2

- 새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에게*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새 두 마리 날고 있다

한 마리는 공중에

한 마리는 땅위에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고 있다

나르다 문득

고욤나무 가지에 앉을 때

땅위를 나르던 그림자도

사뿐히 날개를 접고 새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언제부터인가

새 두 마리가

고욤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

어제보다 가지가 약간 더

휘어져 있다.

 

*유대인 설치예술 작가. 그림자놀이로 유명함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3

- 609동에서 608동으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에게 2

 

 

해가 기울자

609동 그림자가 슬그머니

제 몸 밖으로 나와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뒤쪽 608동 유리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른다

수직빙벽에 아이젠을 박으며

까마득히

저녁노을에 반짝이며

그 여자의 창까지

그 여자의 하늘까지

맨 몸으로 오르고 있다

어두워지자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

한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그림자도  몸을 숙여서

그 여자의 자궁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4

 

 

 말없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살아왔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그 그림자가 보인다 말없음도 보인다 말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온 깊은 슬픔의 뒷모습도 보인다 함께 먹고 함께 깨어났던 내 몸의 높고 낮은 그림자들 보인다 목을 길게 빼고 먼 산을 바라보던 고통과 기다림의 그림자들 보인다 어둠이 오면 재빠르게 몸을 숨기던 좌절과 절망의 그림자들 보인다 언제나 말없는 어머니의 그림자 그 그림자의 침묵도 보인다 이제는 쓰다듬을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그림자들 말없는 목격자들 어둠속에 묻힌 상처들 보인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내 몸의 그림자들 보인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6

- 영진목장

 

 

 관동리 사람들은 아무도 영진목장의 소를 본적이 없다 다만 언젠가 저녁 어스름에 뱃고동처럼 길게 울리는 울음소리만 한번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진목장에는 지금도 커다란 젖통을 출렁거리는 암소가 있다고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순전히 "영진목장"이란 부서진 간판 때문이다 공장 땅으로 파헤쳐 사라진 내 고향 귀현리도 그렇다 내 속에 새겨진 "귀현리" 란 이름 때문이다 없어진 고향의 그림자를 부둥켜안고 삼십년을 지나왔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귀현리에 살고 있다 도대체 떨치고 문밖으로 내닫지 못하고 늙은 암소처럼 묶여있다 그림자에 묶여서도 아주 생시처럼 잘 살고 있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7

-감나무 한그루

 

 

관동리 관동정사

뒤뜰의 무덤

그 사이

늙은 감나무 한 그루

붉은 감 그득 품어 안은 가지를

한쪽은 무덤에

한쪽은 관동정사에

한쪽은 그림자에

한쪽은 그림자의 집에

드리우고 있다

땅에 닿을 듯 낮게

감나무의 몸이

열려 있다

내 몸의 어디가 열리는지

때는 늦은 가을

문득 가던 길 멈추며

가슴  떨린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10

-봄

 

 

 봄 들판에 장작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갑니다 하동에서 광양까지 매화가 만개한 길을 적재함이 터질듯 참나무 장작을 실은 자동차들이 줄지어 지나갑니다 처녀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저 꽃 봐! 저 꽃 봐! 함성을 지릅니다 반짝이는 강물에 붉은 꽃을 던지며 목이 잠깁니다 간이주점 마당에 풍선을 든 아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습니다 놀란 새들이 매화나무 가지를 박차고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화꽃 그늘에 한동안 깊이깊이 잠겨 있습니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11

 

 

 사람이 떠나면 그 자리에 그림자만 남는다 언제나 그렇다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는 내 속에 구멍을 파고 들어 앉는다 쫒아낼 수도 없다 평생을 함께 자고 함께 깨어난다 어느 때는 불쑥불쑥 자라나서 온 몸을 자기의 그림자로 덮기도 한다 눈물이 되거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증오란 이름으로 부둥켜안고 홀로 끙끙거리며 산다 세월이 가도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 그림자들로 나는 꽉 차 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떠나지 않고 헤어지지 않고 어찌 다 함께 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무거운 몸들을 이고 지고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12

-앞잡이

 

 

 해방 전후까지 그는 누군가의 앞잡이였다 쥐꼬리 같은 위세를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을 끝없이 괴롭혔다 앞집 심생원도 그에게 죽도록 맞았다 남의 산에 나무를 한 죄로 아이쿠! 내 눈! 눈알이 튀어나왔다고 얼굴을 감싸 쥐고 좁은 마루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무명 저고리에 피가 낭자한 늙고 힘없는 한 소작농의 피와 눈물을 보았다 누가 그를 그림자라고 했다 아무도 그를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병신이 된 심생원은 낡고 찌든 그의 오두막을 버리고 한밤중에 지긋지긋한 고향을 떴다 그리고 다시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선머슴 같던 초등학교 동창 순자도 갔다 그 후 그림자도 끈 떨어지고 늙어 오갈 때 없이 전전하다 고향을 등졌다 슬프고 가슴 아픈 시절이었다.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13

-볼가강의 뱃노래

 

 

불곰 <이반 레브로프>*의

“볼가강의 뱃노래”를 들으면

배를 끌고

강을 거슬러 가는

긴 수염의 남자들이 보인다

어깨에 가죽 끈을 걸고

어이영차! 어이영차!

짐승처럼 몸을 숙인

늙은 사내들이 보인다

생의 끝을 잡고

아 아 낮게 더 낮게

자작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볼가강과 사내들이 보인다

낮아서 더 장엄한

러시안 벨칸토에는

아직도 언듯 언듯

혁명의 검붉은

그림자가 보인다.

 

*러시아계 독일 베이스 가수

 

 


 

 

고영조 시인 / 그림자 . 14

- 피라미와 놀다

 

 

 오늘은 집 앞 새노래 천에 살고 있는 피라미들의 집을 지어주었다 수십 마리 새끼를 거느린 어미를 대신해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넓적한 아름 돌 열 개를 맑은 물속에 겹겹이 지그재그로 쌓아 만들었다 내 발자국 소리에도 놀라 모래 바닥을 우왕좌왕 헤엄치는 놈들을 위해 작은 오두막을 지어주었다 쉬고 잠자고 숨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틈새를 만들어 주었다 그림자와 틈을 만들어 주었다 피라미들이 내 뜻을 알았는지 쏜살같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피라미들이 바위틈에 핀 꽃처럼 아름답다 오늘은 놈들과 한바탕 시냇물에서 놀았다 정말 큰 일했다.

 

 


 

 

고영조 시인 / 등불

 

 

「먼 길을 가다가 어두워지면

등불을 켜고 간다」

이 쉬운 말을 아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가진 짐이 무거우면

땅 위에 내려놓으면 된다

높은 곳이 어지러우면

주저없이 땅 밑으로 내려오면 된다

등불을 켜고 가다 밝아지면

등불을 끄고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된다

켜고 끄는 마음조차도 없이

먼 길을 먼 마음으로

묵묵히 가면 된다

거기에

등불이 있다

 

이 쉬운 뜻을 아는데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시집 <언덕 저 쪽에 집이 있다> 2001년 포엠토피아

 

 


 

 

고영조 시인 / 등긁게

 

 

쌍계사 민박집에서

치과의사 김묵세가 등긁게를 사서

 

옷 위에 쓱쓱

등을 긁어 보였다

 

오! 저렇게 닿을 수 없는 뒤가 있고

닿지 않는 몸이 있다니!

 

다른 손으로 긁어야 할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우리에게 있다니

 

-시집 <고요한 숲> 1995년 고려원

 

 


 

 

고영조 시인 / 흑백다방

 

 

우리는 무엇인가 되려한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라

 

흑백다방은 그런 생각을 부수어

먼지로 흩어지게 한다

 

SINCE1955 흑백

 

낡은 시간을 만지며

 

봄날 저녁

내 몸 속에서 울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고요히 듣는다

 

 


 

 

고영조 시인 / 인생 수업

 

 

 그들이 갠지스에서 장작더미 밖으로 튀어나온 맨발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유적공원에서 고인돌 아래 안치 된 석관을 보고 있다 그들이 삶이 어떻게 재가 되는지 보고 있을 때 나는 죽음이 지나간 텅 빈 흔적을 보고 있다 그들이 강가에서 불타는 현상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청동기 시대의 불 꺼진 상징을 보고 있다 오열하던 슬픔조차 없이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죽음을 구경하고 있다 죽음을 구경하다니 나는 나의 죽음을 볼 수 없지만 나는 너의 죽음을 볼 수 있다 오늘 그걸 깨닫는다 인생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너와 나의 한순간, 멀리서 잠시 마주 보고 있다

 

-시집 『길모퉁이 카페』 2021 불휘미디어

 

 


 

 

고영조 시인 / 길모퉁이 카페

 

 

'길모퉁이 카페' 앞에

앉아있다

다리가 부러진 간이의자에

기우뚱

앉아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앞이 보이지 않은 듯

왼쪽 오른쪽?

어느 쪽으로 가려는지

기웃거린다

이곳 저곳

냉이꽃 하얗게 피어있다

가던 길 멈추고

한 사람

벚꽃 잎 흘러가는

시냇물 굽어보고 있다

벚나무가지가

시냇물 쪽으로 휘어져 있다

사람도 나무도 구부정하게

시냇물 함께 보고 있다

길모퉁이 의자에

그림자 함께 앉아 있다

봄날 오후 잠시

다리가 부러진!

 

 


 

고영조 시인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1972년 「어떤 냄새의 서설」을 현대시학에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 1986년 제1회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 시집 「귀현리」 「없어졌다」 「감자를 굽고 싶다」 「고요한 숲」 「언덕 저쪽에 집이 있다」 등. 성산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창원 오페라단장, 경남 오페라 단장 역임.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 수상. 성산아트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