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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숙 시인 / 모서리의 방언
모서리를 돌아 시장에 갔다 개를 끌고 가는 사람들 틈을 지나 두부 가게 앞 주인 따라 가만히 앉은 개의 눈빛이 순두부 같다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좌판에 올려진 두부 한 모에 이천 원이라고 한다 한 모라는 말에는 칼의 기억이 숨어있다
가만히 앉아있는 개와 눈이 마주친다 개의 눈빛에도 모서리가 있다 순한 것 같지만 갑자기 사나워지니 조심하라고 개 주인이 한 마디 한다 두부의 모서리도 허물어지면 사나워진다
자신의 각을 허물어 본 적 없는 모서리는 위험하다 물컹한 살덩이에 놀란 칼에 손가락을 다치기도 한다 번지수 모르는 시장 모서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출했다 돌아온 엄마가 보인다
지청구가 심한 할머니는 간수 모자란 두부처럼 물러터진 엄마를 늘 나무라곤 했다 불같은 할머니 성격에 무너지기만 하던 엄마는 화를 두 배로 끌어 모아도 한 숟갈 간수만도 못해서 이빨이 없어진 뒤에도 할머니는 순두부 같은 엄마를 입에 넣는 일이 많아졌다
무쇠솥이 거품을 물고 올라올 때마다 엄마는 찬물을 끼얹었다 끓어 넘치는 것은 빨리 식혀주어야 한단다 엄마가 만든 두부는 하얗고 반듯했다 칼이 지나간 자국이란다
아버지는 두부를 모서리부터 베어 물곤 했다 모서리의 방언을 좋아했다 물컹한 엄마의 모서리는 허물기에 쉬웠다
금방 허물어질 두부에도 칼의 기억은 있다
박재숙 시인 / 사정
내게 사정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혼자 달아올라 지금 어쩌라는 건가요
애걸하는 당신과 나 사이 낡고 헐어진 기억 한 조각으로는 깊숙이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요 적극적인 끌림에 약하다고요 내 왼쪽 뇌를 자꾸 실험하지 마세요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세요 지금은 정말, 정말 선택을 선택할 수 없어요 밤을 샐 작정인가요 당신의 몸짓 하나에 내가 흔들릴까 두려워요
제발 제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나도 무너지기 직전이예요 자존심을 뭉개버린 나쁜 여자가 되기 싫어요
사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의 태도는 달라지겠죠 제발 무릎만은 꿇지 말아요 도장 없이도 우린 타인이 될 수 있잖아요
이 순간 당신의 여자는 어떤 남자에게 사정을 하고 있을까요
박재숙 시인 / 테트라포트, 꿈, 시작 노트
부서짐도 일종의 만남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부서진 꿈이 활자가 되는 일은 참 신기한 일이야 포말로 부서지는 파편들을 몸이 먼저 느낄 때가 있어
물에 눌려 질식할 것 같은 날엔 수면 아래로 아래로 꺼져 가는 심해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했어 부표를 따라가는 바닷길은 깊고도 끝이 보이지 않아 가도 가도 그곳에 또 다른 부표가 있다는 걸 누가 알겠어
미처 부표에 이르지 못한 것들이 파도가 될 때 풍랑은 더욱 거세지고 시야는 점점 흐려지곤 했지
이곳에서 너무 오래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보면 내 안에 어떤 말, 어떤 미래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어 찰랑이는 몸의 리듬이 느껴질 때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로 왔다가 실없이 부서져 돌아가는 꿈, 너라는 존재는 참 낯설었어
간밤에 폭풍 아래로 가라앉았던 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수면은 어김없이 물비늘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뜰 수 없게 부시지
한차례 밀려왔다가 밀려가면서 네가 내게 전해주려 했던 것들은 어떤 섬, 어떤 수평선의 비밀스런 전언이었을까
난 이제 알아 너를 보낸 후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따개비 같은 것들이 네가 내게 남겨놓은 화석 같은 말들이었다는 걸
박재숙 시인 / 수타
알몸을 두드리고 늘리고 포개고 뭉친 근육을 풀어준 뒤 최대한 길게 뻗어가는 상상을 해요 그 속에 슬쩍 무언가를 넣고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해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팽팽한 발효를 멈추고 비밀로부터 자꾸 멀어져요
지문에 묻어나는 표정을 폈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한때의 유순함이 외고집의 감정을 껴입어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질문들 풍부한 기계의 취향들 전부 다 유쾌해져요
속도를 견디다 보면 소심한 감정에 탄력이 생기죠 뭉친 생각들에까지 찰기가 돌아요 생계의 틈새까지 잡아주면 그때부턴 매끈하게 혈기가 돌죠
호흡을 가파르게 치대고 어르고 달래면 맨살에 들러붙는 관능에 당신의 미각은 황홀해져요
가늘고 탱탱한 전신이 쫄깃하고 낭창낭창한 손길에 전율과 리듬을 품으면 삭제하고 싶었던 기억에까지 침이 고이고 말죠
지금 막 우산을 쓰고도 젖은 채 들어 온 당신 강력분을 원하나요, 중력분을 원하나요 떨림이 사라지기 전에 주문을 걸어보세요 그날 그때 당신 앞에 앉았던 그 사람처럼…
박재숙 시인 / 달아나는 취향
당신은 건조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나는 부드러운 스타일을 좋아해요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다른 취향이었는지 하나 남은 와인병에겐 물어보지 마세요 항상 따는 쪽은 당신이고 건배하는 쪽은 나였지만 오늘만은 아무것도 부딪히고 싶지 않아요 바디감은 입안과 입 밖에서 서로 다르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지요 오크 위쪽의 기분과 아래쪽의 기분이 다르듯 당신은 얼마나 내 표정이 숙성되고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식탁은 조심할 필요가 없지만 투명은 예민해서 매번 조심해야 돼요 천천히 번져가는 실금 따윈 없으니까요
일부러 휘청거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침대를 원하고 나는 베란다를 원해요 잔과 잔 사이 찌푸린 미간이 강한 촉감을 삼키고 있어요 당신의 탁한 취향이 당신의 허물을 한 겹씩 벗기는 걸 느껴 봐요 첫맛과 끝 맛은 달라요 우린 서로 다른 원산지를 가졌지요 불현듯 발병하는 고독과 슬픔의 뿌리를, 그동안 깨져버린 와인 잔은 누가 치웠을까요 당신도 나도 익숙한 몸짓을 원한 것도 아닌데, 초대받은 난간과 추방된 육체 사이 떠도는 홀림이 있어요
파국은 늘 예고 없이 당당하게 찾아와요 저항을 흔쾌히 부수고 결말 이후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속수무책뿐인가요 묵직한 기분이 자꾸 허공을 향하고 있는데…
박재숙 시인 / 흰꿩의 다리
흰 꿩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하얀 발목만 남겨두고,
흰 꿩의 혈통들은 모두 다리가 짧아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자주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날에 나는 너에게 말해 저기야! 왼쪽으로 가면 흰 새가 앉아 있을 거야, 다리가 예쁜 새
자.만.추를 추구하던 너는 찰나의 흐름을 포착하는 습성이 있어 희고 흰 정신적인 사랑은 매우 달콤하고 숭고할 거야 나는 이미 내 몸 안에 있는 너의 갈비뼈를 사랑하게 됐어 그리하여
나는 매일 꿈속에서 흰 꽃을 가꾸기로 했지 아가페, 이런 맹목적인 사랑처럼 말이야 한결같은 정성이 나에게 있기나 한 걸까? 정성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걸 눈치챈 꽃이 먼저 알고 스스로 시들기 시작하더군
바닥난 열정이 더 이상 샘솟지 않자 흰 꽃은 조용히 속삭였어 오늘부턴 어떤 색깔의 감정으로 옷을 갈아입지?
막장 드라마를 보고 난 후에 찾아오는 막장 같은 기분이 애매하고 꿀꿀해지는 오후 새 친구를 소개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꽃, 꽃보다 이파리가 더 화려하다고 느껴지는 날은 여름이었어 강렬한 태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꽃의 여름은 너무 희어서 우리는 저 꽃을 다리가 아픈 새라고 부르곤 하지
예쁜 다리가 아픈 다리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흰색이 놓친 무수한 색들 때문일지도 몰라 흰 다리만 놔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꿩들이 찾아 헤매는 색은 도대체 어떤 색인지, 저물면서도 점점 화려해지는 가을 단풍에게 물어보기로 했어
박재숙 시인 /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 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 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 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 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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