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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금비 시인 / 최애 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0.
김금비 시인 / 최애

김​금비 시인 / 최애

언니가 없는 세상에 남은 나는

아무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니가 없는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누구에게나 잘 업혀있게 되었다

아기와 나는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함꼐 운다

아는 게 없어서

또 아는 게 너무 많아서

아기는 매일 울고 매일 배고프고 매일 자란다

자고 일어나면 슬픔만큼 자라있는

불쑥불쑥 언니가 솟아나는

아기를 안고 지구에 서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언니를 안아볼 걸 그랬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해 말하지 못해서

나는 빵처럼 부푸는 아기를 돌본다

언니를 땅에 묻었으면서

잘도 고개 들어 손 흔들곤 한다

​-웹진 『시산맥』 2024년 겨울호 발표

 

 


 

 

김금비 시인 / 종로 3가의 저녁

​​

바지 밑단이 흠뻑 젖은 애인과 걷는 저녁

피로와 영광을 들쳐 메고

어깨를 부딪치며 비를 피한다

작은 우산 안에서 들썩이는

맑은 이마들

사랑으로 충만해져

젊음을 흉내 내면서

장기 두는 노인들을 배경으로 언성 높이고

버튼식 신호등 앞에서 입 맞춘다

손잡고 걸으면 용감해지는 어린 연인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가장 놀라워해서

불을 처음 본 유인원처럼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논다고

탑골공원 안에서

서순라길 담벼락 앞에서

사랑은 뜨겁고 분노는 차갑지만

오래 쥐고 걸으면 모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그 놀이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아해

손잡고 빗속을 걷는다

뜨거운 몸으로 칭얼대는 애인아

"지금은 기록할 시간이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할 시간이야. 지나간 시간을 우러를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영광되게 해야 한다고." *

​​

*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1월호발표

 

 


 

 

김금비 시인 / 새, 개

 

 

새로운 개를 데려온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

 

까만 눈과 코를 한 번 더 마주한다는 기쁨

절룩이지 않는 다리로 함께 뛰고

이리와 엎드려 몇 번이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시작하는 만큼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늙은 개의 습성을 찾으려는 믿음은 그치지 않는다

세계 안에서

엎드린 모양새나

물을 먹는 자세

오이를 좋아하고 양배추는 퉤 뱉는 모습을 보며

 

내가 아는 개를 찾는다

기어코 네 영혼이 들어 있다 믿어본다

전혀 새롭지 않은

지긋지긋할 만큼 서로를 전부 알던

크고 부드러운 내 친구를

 

나의 새 개가 물고 온 고무공

새로운 장난감들 속에서 꼭 그 공만 물어오는 개에게 묻는다

너, 그 안에 있지?

전부 버리고 딱 하나 남겨둔 것이라고

 

관심 없는 개는 꼬리를 흔들며 공을 물어뜯는다

가볍게 뒤집힌다 아기답게

새로 태어난 것처럼 씩씩하게

부드러운 귀를 열어

나 이제 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속삭여본다

세계 안에서

새 개와 함께

 

 


 

 

김금비 시인 / 1인용 커피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30초 동안 나는 너를 생각한다 잠깐 머뭇거리다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깊고 진한 그것 우리 함께 봤던 강물처럼 끝을 모르게 어두운

 

 잘 내린 에스프레소를 작은 잔에 옮겨 담는다 적은 커피에는 작은 잔이 필요하다 그럴듯한 받침까지 두고 나서야 점치듯 표면을 바라본다 이런 걸 타이거스킨이라고 하는 거야 설명 없이도 이 커피는 잘 내려졌다

 

 진한 커피 마셔도 잠 잘 자는 사람과 커피우유 한 잔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은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죽은 게 아닌데 살아가며 다시 만날 일 없다는 거 조금 이상하지 않니? 그렇게 시작하는 문자가 도착했다

 

 나는 이제 너 없이도 깊은 잠 잘 수 있다 진한 커피 마시고 1인용 의자에 앉아 창문 밖 나란히 지나가는 연인들 바라볼 수 있다 달지 않은 설탕이 필요합니다 휘휘 저어 마시면 쓰지 않고 달지도 않다 쓰고 달아도 예 그럼요 아무 상관없다

 

 네게 배운 것들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 맛있는 커피 내리는 법도 이름이 어려운 아일랜드 밴드 음악도 스피커 볼륨을 높이고 흥얼거린다 다 마신 커피잔에 혀 넣어 보다가

 

 여기요, 하면 나는 서둘러 달려간다 안녕하세요, 주문받는다

 

-제18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작 중

 

 


 

 

김금비 시인 / 에어앤사운드

 

 

미술관에 가면 언제나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그래서 좋았다

 

뒤돌아보면 차가운 흰 벽

들이키면 먼지와 정적뿐인 곳에서도

나는 곧잘 숨을 참았다

코너를 돌면 내가 아는 그림이 있었다

 

지나간 세대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호로 그려져 있다

낯선 공간에선 마음이 쉽게 허물어져 버리고

 

우리는 나란히 서서 그림을 본 적 있다

에어앤사운드

그림에서 파란 점을 보는 사람과

커다란 구멍을 찾아내는 사람은

나란히 걸어 나갈 수 없다

나는 슬며시 뒷짐을 지고 밖으로

 

에어앤사운드

우리는 왜 다른 미래를 보고 말았을까?

적절한 습도와 온도

미술관에선 왜 자꾸 소름이 돋을까?

 

21세기의 나는

하얗고 차가운 건물 안에서

테두리 속의 연인을 본다

가깝고 멀어지는 마음처럼

그림을 들여다봐야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각자의 속도에 맞게

다음엔 더 잘해야지 다짐하면서

 

뒤돌아보면 여전히 흰 벽이

코너를 돌면 내가 아는 그림이

 

이 안엔 죽은 사람들의 사랑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자꾸만 입이 말랐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김금비 시인

2000년 서울 출생.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2023년 계간《시산맥》으로 등단. 제18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