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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달 시인 / 우글거리는 고백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0.
박해달 시인 / 우글거리는 고백

박해달 시인 / 우글거리는 고백

 

 

죄아닌 죄를 고하는 종탑

땅으로 고꾸라져 억새꽃 가득한 들녘에 몸을 푼다

 

무화과밭엔 자라지 못한 뱀들이 우글거리고

아무도 호수湖水를 호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별똥별 떨어져 반딧불과 섞이는 밤

 

만삭의 뱀이 서녘 산을 삼키다 빠르게 숲으로 들고

하구 둑 빛바랜 시멘트 조각 위

부슬거리는 배경으로 나는 서 있다

 

호수가 바다로 가는 동안에도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울음으로 갈증 난 밤이면

당장 너를 끌어다 놓고 싶다

 

무작정 흔들린 채로

부러진 채로

바람을 마시며

시월의 풀처럼 눕는다

 

-시집 <꽃인줄 모르고 핀다>에서

 

 


 

 

박해달 시인 / 나비와 나비

 

 

물컹하게 깨문 살점이 내 여린 유년 같다

 

돌아보니

 

볕 바른 토방 마루에 앉았다 사뿐 날아가는 한 마리의

나비인 듯하다

 

오백 살 먹은 은행나무

마당 한가운데 당당히 뿌리 내리고

 

아버지의 충직한 나비는 총명한 셰퍼드였다

달이 빛을 잃은 밤

그림자 담을 넘다 다리를 물리고

그 밤 나비는

은행나무 뿌리로 들어가 노랗게 팔랑거렸다

달빛이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엄마를 찾고

어린 나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은행나무엔 주렁주렁 열매 열리고

대문 안으로 수많은 나비 떼가 날아왔다

 

그 해가 다 가도록 엄마는 오지 않았고

 

기다림이 떼지어 울었다

 

그림자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시집 『꽃인 줄 모르고 핀다』(상상인, 2023)

 

 


 

 

박해달 시인 /  꽃인 줄 모르고 핀다

 

 

볕을 모아

겹겹이 두른 동백림

 

새들은 상두꾼 소리 따라 울고

뚝,

뚝,

떨어진 붉은 꽃송이

 

숨 가쁘게 아버지를 곡한다

 

“유리창 너머 자꾸 나를 부른다

어여 가, 어여 가 훠이”

 

새를 쫓듯 팔 내젓던 아버지

꽃무등 타고 떠나신 길

 

“너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구나”

 

“아버지, 무거운 날개 이제 내려놓으세요”

 

동박새 날아온 이른 봄

 

아버지 놓고 간 자리마다 움트는 눈

그늘 아래 꽃인 줄 모르고 핀다

 

시집 『꽃인 줄 모르고 핀다』(상상인, 2023) 수록

 

 


 

 

박해달 시인 / amor fati를 거스른 욕망

 

 

운명을 믿지 않기로 한다

 

폐까지 차오른 눈물이

나무 밖으로 흐를 때

 

꽃으로도 감출 수 없던 아픔

 

거짓말이 필요할 때

두 얼굴을 보여봐

 

천사와의 키스처럼 달콤한 말

 

유혹일지

실패일지

 

햇볕이 짜놓은 그물에

꽃의 말이 걸린다

 

운명을 두 번 믿지 않는다

 

-시집 『꽃인 줄 모르고 핀다』

 

 


 

 

박해달 시인 / 원시림에서 걸어 나오는 백석

 

 

한입에 삼킨 정오가

명치 끝에 얹혀 꼼짝하지 않는 시간

 

육모정과 풀꽃 시계의 어디쯤

 

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담배 한 개비에

태 자리로 돌아간다

 

어린 애인이 태동을 느끼고

무릎을 내어주는 꿈을 꾼다

 

초록 선 분명한 수박 한 덩이를 깨뜨렸다

 

빨간 웃음이 흘렀다

 

백석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박해달 시인 / 알지 못하도록 초록

 

 

난 늘 초록이었어

초록이어야만 하는 패를 쥐었으니까

 

가을로 물드는 너를 보며

갈색 꿈을 꾸기도 했지

 

너는 무감하게 말하지

갈색은 겨울나기를 위한 순서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좀 더 진한 초록을 품어야 한다고

 

뇌척수막염을 끌어안고

척추뼈에 한 뼘 크기의 바늘을 꽂았을 때

애벌레처럼 웅크린 태아가 된 듯했어

 

몸속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아무 데나 흐를 때

구멍마다 절망이 들어앉는 소릴 들었어

 

버렸던 꿈을 다시 꾸는 시간으로

초록으로 돌아가기 위한 아픔으로

척수액에 몸을 녹였지

 

새로 돋을 시푸른 초록을 위한

기꺼운 기침

 

 


 

 

박해달 시인 / 어디쯤

 

 

당신, 오고 있나요

풀꽃 방석을 깔아 드릴 테니 한번 다녀가세요

봄이 죽은 산기슭엔

온통 얼음새 꽃이 피었어요

 

쌓인 눈이 추억에 구멍을 뚫은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하로 가는 뿌리가 눈 속에서 파르르 피어날 리 있겠어요

한 손에 황금잔 들고

소의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기만 했는데

얼레지 보랏빛 치마가 춤을 추어요

 

숨소리로 유혹한 독배를 드는 시간

적막과 혼돈의 자궁 속에서 바람이 혈서를 썼어요

늑골의 맥을 이승의 인연으로 끌고 가네요

 

어느 마을에 물고기 비가 내려 바닥이 펄떡거렸는데

이 봄을 지핀 불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분명해요

갈증을 참은 듯 한꺼번에 타올랐어요

 

늑대 한 마리 내 안에서 빠져나와

꽃나무 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요

 

으허허헝 우우우우

천둥의 혈관을 찾아서요

 

2022년 《한맥문학》 등단시

 

 


 

 

박해달 시인 / 무심

 

 

무無 밭인 창공을 향해

함 뼘만큼의 설움을

바닥을 치고 오른 가지처럼 내민다

 

영혼이 누워도

안간힘으로 버티는

육신의 굴레에서 움트는 지독한 사랑

 

아무도 모를

잔상이 겨울로 고스란히 남아

감히 나는 울음 우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슬픔의 글자들이

강물 위에 비로소 역할을 내려놓는다

 

 


 

 

박해달 시인 / 고구마를 굽는 시간

 

 

문맹과 문명이 서로를 만지는 시간

섭씨 250도에서 약 50분

고정된 온도에 시간을 맞춘다

 

뜨거움 속으로 고구마가 온몸을 내어주는 동안

전화벨이 울린다

하늘길 날아오는 당신의 목소리

밝고 경쾌한 노란빛이다

 

흐린 몇 날을 옷깃에 채운 셔츠가

달큰한 고구마 냄새를 재빨리 받아 삼킨다

 

화석처럼 뜨거운 눈물 한 방울로 목이 메고

입력된 산, 들, 바다가 아득해진다

 

당신은 그 먼 시간을 건너온다

 

달콤함과 구수함이 맞닿는 지점에서

혀끝에 말려 붉은 침으로 익는 고구마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문맹이라도 좋겠다

 

 


 

 

박해달 시인 / ​무화과

뒤란 돌담에

비단구렁이 몸통만 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

엄마를 기다리는 저녁이 되면

동생과 나는 돌담을 타고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어

넓은 잎사귀 뒤에 숨겨 놓은

꾸덕꾸덕 자글자글한 엄마의 젖꼭지를

두 손으로 찾아내 베어 물었지

톡톡 입안에서 꽃씨 터지는 소리

진득하고 다디단 젖물이 혀와 목젖을 타고 흘러왔어

담쟁이덩쿨로 둘러싸인 성당을 지나

돌담 이어진 골목 끝 우리 집

하느님이 엄마를 대신해 숨겨 놓은 선물인 게 분명해

동생과 나는 비단구렁이를 몸에 감고

신이 주신 선물을 찾아냈어 보물찾기처럼

 

 


 

 

박해달 시인 / ​의미가 되기까지

 

 

너를 사과라 부르기로 한다

 

 어느 날 입 안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눈동자

 

 까슬한 눈빛을 준 후 볕 바른 곳에 너를 묻는다

 

 하루, 이틀, 닷새 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흙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고

 씨앗 너머의 세계로 갔을 거라 믿었다

 

 하얀빛이 어둠을 삼키며

 순백의 아이로 거듭나는 걸 본다

 흙 속의 바람을 세상 밖으로 민다

 

 한 입 베어 문 흔적

 고스란히 기록된 너의 머리

 연둣빛 물이 오르고

 초록 싹 돋는 걸 본다

 

 아장아장 작은 너의 땅이 생길 때까지

 견디고 견딜 것이다.

 

 너는 나에게 한 알의 숨이 되었으므로

 

-시집 《꽃인 줄 모르고 핀다》에서

 

 


 

박해달 시인

전남 목포에서 출생. 본명: 박영미. 순천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22년《한맥문학》 등단. 시집 『꽃인 줄 모르고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