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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 젖 물리는 개
어미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문태준 시인 / 동화
한 아이가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작은 손으로 흙을 파내면서 땅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 아이는 땅속에 숨겨놓은 캐스터네츠를 꺼내고 있었다
한 아이는 동그랗게 언덕을 쌓고 있었다
한 아이는 연못을 오목하게 파고 있었다
한 아이는 노란 민들레에게 물을 주고 있었다
한 아이는 두더지를 따라 비옥한 꿈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태준 시인 / 아침은 생각한다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을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을 축하해요!
문태준 시인 / 모닥불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문태준 시인 / 빛깔에 놀라다
죽은 나무를 덩굴이 휘감아 끝에 벼랑까지 올라갔다 그 나뭇가지 아래 저만치 작은 沼가 있다 물빛 아래 버들치 몇 마리 벗은 발로 불은 쌀 같은 살찐 그림자 끌고 물때 긴 돌의 푸른 이마를 천천히 짚으며 짚으며 무심하다 고요하고 한가하다 한가하다 화들짝 그림자들이 도망쳤다 물 위에 작은 잎 하나 내려앉았다 단풍이었다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문태준 시인 /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말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광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채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문태준 시인 /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나 해서 자꾸 마음이 걸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바람이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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