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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젖 물리는 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문태준 시인 / 젖 물리는 개

문태준 시인 / 젖 물리는 개

 

 

 어미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문태준 시인 / 동화

 

 

한 아이가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작은 손으로 흙을 파내면서

땅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 아이는 땅속에 숨겨놓은 캐스터네츠를 꺼내고 있었다

 

한 아이는 동그랗게 언덕을 쌓고 있었다

 

한 아이는 연못을 오목하게 파고 있었다

 

한 아이는 노란 민들레에게 물을 주고 있었다

 

한 아이는 두더지를 따라

비옥한 꿈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태준 시인 / 아침은 생각한다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을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을 축하해요!

 

 


 

 

문태준 시인 / 모닥불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문태준 시인 / 빛깔에 놀라다

 

 

죽은 나무를

덩굴이 휘감아

끝에 벼랑까지 올라갔다

그 나뭇가지 아래

저만치

작은 沼가 있다

물빛 아래

버들치 몇 마리

벗은 발로

불은 쌀 같은 살찐

그림자 끌고

물때 긴 돌의

푸른 이마를

천천히

짚으며 짚으며

무심하다

고요하고 한가하다

한가하다 화들짝

그림자들이 도망쳤다

물 위에

작은 잎 하나

내려앉았다

단풍이었다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문태준 시인 /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말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광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채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문태준 시인 /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나 해서 자꾸 마음이 걸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바람이 나에게

 

 


 

문태준(文泰俊)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