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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영 시인 / 왼손의 유전 외 1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2.
이미영 시인 / 왼손의 유전

이미영 시인 / 왼손의 유전

 

 

아이들이 기생수*라고 놀렸다

기초생활수급자를 줄인 말이라는 댓글도 달아주었다

 

그 이후로 왼손이 말을 걸어온다

깊이 생각하지 마

선생님은 비밀이 없고 친절하다

꼭 그렇게 다 말해야 합니까

오른손을 들고 항의하고 싶은데 왼손의 충고가 멈추지 않는다

 

얼굴을 씻고 문자를 찍는데도 손의 용도는 정해져 있고

아무도 오른손이 보낸 말들을 받지 않는다

도대체 행방불명된 말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바지 주머니에서 왼손이 튀어나와 박장대소를 한다

해질녘, 교실 구석에서 뺨을 맞은 왼쪽이 서 있다

 

일기를 쓰다가 잠이 들면 그날의 기분을 왼손이 고쳐 쓴다

아버지, 왼손이 이상해요

나를 닮아서 그렇단다, 얘야

아버지는 프레스에 잘린 왼손을 내밀었다

의수를 뺀 아버지의 손목이 뭉툭하고

기생수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에 놀라, 그날 밤 나는 환지통을 앓았다

 

잘린 플라나리아는 없어진 몸통이 다시 자라난대요

아버지와 나는 밤마다 왼손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

 

*기생수(奇生獸): 일본 애니메이션

 

- 『2020년 경기문학』, 청색종이, 2020.

 

 


 

 

이미영 시인 / 뿔

 

 

 의식이 희미해지면 세상이 뿌리째 흔들리는 은유일까요

 아니면 중심이 중심을 밀어내고 있는 진행형일까요

 

 당신이 누워있습니다

 

 외뿔처럼 남아있는 영혼이 뽑힌다는 건 다른 계절로 건너가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어요

 단단한 시절이 흔들리면 뽑을 때가 된 거라고, 그래야 멀리서 온 빛 한 줌 삼킬 때가 오는 거라고, 엄마의 기도는 멈추질 못 합니다

 

 잠재울수록 일어서는 눈동자가 뭐라도 마시려는지 허공의 마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실로 젖니를 감아올릴 때처럼 입가에선 수백 마리의 목마른 새가 환생하고

 

 그칠 줄 모르는 혼잣말, 투명을 건너다보는 눈빛

 숨결이 뽑힌 자리에 검붉은 고요만 남으면 어떡하나요

 

 어둠을 수혈 받고 있는 당신은

 아랫니든 윗니든, 자고나면 하얗게 솟아나던 어릴 적 식탐의 기억을 채우고는

또 다시 턱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무엇을 물고 매달리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슬픔의 밀도는 팽팽하고

 침묵으로 밀봉한 밤은 언제든 울음을 터뜨릴 채비가 되어있습니다

 

 번개가 뿌리내리며 아픈 발을 송곳처럼 끌어당기는 어둠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나무 곡두를 깎는 소리

 망자의 몸은 아흔아홉 겹의 천에 싸여진다는데

 새벽, 몽우가 내렸습니다

 사라지는 당신의 옷자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빗방울로 만든 백 번째 마지막 한 겹을 입고

 신의 섬광을 맞은 흰 뿔이 우주의 지붕 위로 날아간 후였을까요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SF식 이별

 

 

 너의 마지막 선언은 빛의 광속구보다 빨랐지

 순간 내 표정은 성간 구름을 가로질러 은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고

 통신이 끊기고 연료가 바닥난 나는 홀로 방치된 우주선 같았어 혹시 내게 했던 말 기억하니? 화이트홀의 심장처럼 사랑한다고 했던 거 말이야 태양계 바깥에 있는 B1처럼 춥고 외롭다고 했던 말도… 거대은하 속에 직녀와 견우의 사랑 따윈 없다고 했던 말은 정말 잊은 거니? 진통 없이 태어난 별이나 환상통을 모르는 유성처럼 너는 내게 왔다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말았어 돌아서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마법 같은 천문대 안에서 우린 홍염으로 가득 찬 초신성의 마지막 숨결처럼 뜨거운 키스를 했었지 벌룬은 터질 듯 했고, 사랑과 사람의 밀도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는데… 오늘 내 마음은 수명이 다한 위성처럼 추락하고 있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대기권에 진입한 잔해들은 남김없이 타서 없어진다는 걸 그래 맞아 지금 내 슬픔의 온도는 천오백만 캘빈 네가 사라진 좌표를 향해서 불타고 있어

 

-계간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샴

 

​왼손과 오른손이 가위 바위 보를 해

그러면 멈출 수 없지

동시에 같은 것을 낸 적이 없으니까

 

나이면서 너이고 너이면서 나인

숨바꼭질이 가능한 계절

 

늦은 오후, 한 다발의 수국이 당도했을 때

우리는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지

송이송이 시든 이 꽃의 기원은 발화일까 낙화일까

서로를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일치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배웠어

애증하지 않겠습니다, 무언가를 동시에 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할 땐 두 손을 맞잡아야 해

 

동음이의어를 좋아하느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

 

앞치마를 두르고 공원을 달려봐

수영모를 쓴 채 영화관에 앉아있어 봐

상상은 자유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순을 사랑하나 봐

 

요즘 숨바꼭질에 재미를 붙였어

둘 다 꿈을 못 꾸는 병에 걸리면서부터야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밑동에 붙어있는 버섯에서 먼지 같은 포자가 퍼지는 시간

 

이음동의어도 좋아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지 마

 

다정을 병이라고 진단한 의사가 마라를 처방해주었지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식당에 들러 매운 마라를 먹었어

그럴 때는 둘의 의견이 일치한다니까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왼손과 오른손은 각각 누구의 편일까

지는 사람도 이기는 사람도 없는 게임이지

 

어느 날, 빛나는 돌맹이가 우리를 향해서 날아왔을 때

너는 반쪽만 깨진 나무의 반사를

나는 위험하게 매달린 새의 투영을 지켜보았어

같은 곳을 보게 되면 당신을 찾아갈게

 

꽃잎이 휘발되고 소나기가 구름을 건져 올리는

초침 소리가 다가와

그날이 오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지루해지겠지

 

나이면서 너였고 너이면서 나였던

한 다발의 거리, 두 쌍의 눈빛

 

소년이 찾아와서 전해주었어

내일 당신이 이 곳에 도착할 거라고

-월간 『모던포엠』 2025년 3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 발굴되지 않을 세계

 이곳은 주어가 없는 세계입니다 투명하게 반사하는 동사만 기억되는 세계입니다 누구라도 증언하고 싶지만 결국 누구인 사람은 없습니다 주어가 없는 세계니까요 주어가 없는 세계에서 주어가 아닌 사람이 하품을 합니다 더운 여름이 지겨운 모양입니다 창문을 엽니다 웬일인지 창문을 열자 문이 나옵니다 문을 엽니다 푸른 초원이 나타납니다 주어 아닌 사람이 햇살을 받으며 걸어나옵니다 푸른 정원에서 푸른 주스를 마시고 푸른 빵과 푸른 야채를 먹습니다 온 몸에 서서히 푸른 물이 듭니다 여름의 풋내가 느껴집니다 주어 아닌 사람이 푸른 배경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주어가 되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가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언덕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큰 가방을 끌며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어 아닌 사람이 남자에게 다가갑니다 남자는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제복을 입은 남자의 피부는 검습니다 불에 탄 듯 검은 피부의 군인입니다 검은 이마 아래로 땀이 흐릅니다 도와줄까요 남자는 무해하게 웃습니다 주어 아닌 사람은 남자의 검은 가방을 뒤에서 밀어줍니다 무겁겠지만 기억나지 않습니다 몸에서 도는 푸른 물의 힘으로 그렇게 할 뿐입니다 남자의 집에 도착하자 남자가 주어 아닌 사람에게 동전 하나를 건넵니다 사례일까요 대가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무엇일까요 주어 아닌 사람이 뒷걸음치다가 언덕 아래로 도망칩니다 주관적인 감정으로 객관적인 길을 따라 직관적인 본능에 휩싸여 집까지 뛰어갑니다 집에서는 노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이 세계는 엉터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어 아닌 사람은 노인에게 남자 이야기를 해 줍니다 왜 그랬어? 노인이 묻습니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많은데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 도와 주었을까요 왜 돈을 받지 않았을까요 왜 도망쳤을까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어가 아닌 사람과 노인은 이 사소한 사건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계간 『시현실』 2025년 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언캐니

 

 

 마법이란 자신의 자아와 환경을 이해하는 학문입니다* 팻말을 밀고 들어와 테이블에 앉은 너는 작고 투명한 항아리 같다. 타로 카드를 섞는다. 섞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나열한다. 지나온 삶이 한 장씩 뒤집힌다. 너의 엄마는 한 방울의 피와 한 줌의 겨울 달빛으로 너를 난생하였구나. 따뜻한 품에 안고 젖을 먹이기 힘든 난산이었구나 그것이 너의 탄생 설화다 외로워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돌아보지 않는 사랑 뒤에 남은 사람. 한 장씩 펼쳐지는 낯익은 두려움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너.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 종아리에 있던 뱀의 물결이 언제 살을 파고들어 스며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줄 말이 없나요? 나를 쳐다본다. 미궁을 기어 다니던 쥐의 습성이 눈빛에 남아있다. 너를 괴롭히는 건 마음에서 서식하고 있는 상반된 동물적 감각. 꿈틀거리는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는 아이가 보인다. 그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너. 축축한 땀이 내 손 끝에 전해진다. 그렇게 해서 후련하다면 그렇게 하렴. 초경을 들킨 너를 조롱하던 아이들. 그 심장에 열네 번 째 마경을 세우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구나. 기억하지 못할 만큼 멀리 가버린 기억을 다시 카드와 섞는다. 길을 걷던 남자가 생일선물로 받은 너의 외투에 아무 이유 없이 침을 뱉은 날. 그때 생긴 얼룩이 오늘도 불안한 기분 속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구나. 빈혈이 있나봐. 창백해 보여. 익숙하지만 낯설고 낯설지만 친숙한 안부들. 인공눈물이라도 넣어야 할까봐. 아이스크림 얼룩이 묻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도. 슬퍼하기엔 이미 애매하고 잊어버리기엔 자꾸 끈적거리는. 점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네가 선택할 몫인 걸. 카드를 읽는 리더는 점을 보러온 시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곳의 불문율. 붉은 샤스커트 밑으로 카드를 쏟고 말았다. 제 미래도 쏟아졌나요. 네가 웃는다. 다행이라는 듯. 거울 한 장을 마주하고 있는 너와 나. 검은 타르 같은 액체를 흘리며 항아리가 깨져있다. 운명을 점칠 때 가장 복잡한 건 먼 과거이고 가장 단순한 건 가까운 미래라서, 너에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해줄 수가 없다.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Aleister Crowley

 

-계간 『시현실』 2024년 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윙컷

 

 

어느 날 하얀 문조文鳥 한 마리가 당신의 손에 앉았다면

날이 잘 선 가위 한 자루를 장만하십시오

 

새의 날개깃은 자유와 맞닿은 살

흠 없는 영혼과 흠뿐인 말의 간극을 기꺼이 두려워하십시오

 

새는 한여름 빛의 기억에 골몰하고 있을 테니

윙과 컷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지러운 빛의 굴절에 취해 솟구쳐 날아다니지 않도록

편애하는 꿈을 찾아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가위의 유일한 재능은 단호한 금지의 힘이므로

 

주저하지 마십시오 안쓰러워하면 안 됩니다

하늘을 품은 깃털 조각들이 잘려나가도

차가운 가위의 의지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무수한 깃털이 달린 날개의 언어들에게

벽과 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

방종의 부피를 잊고 고독의 질량을 깨닫게 하십시오

새에서 인간으로 추락시키십시오

 

발간 부리와 눈시울로

땅에서 벌어지는 서술어의 세상을 만나게 하십시오

삶을 오독하던 날개깃을 강철 펜으로 벼리어서

얼어붙은 인간의 무지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게 하십시오*

 

*카프카

-계간 『시와 정신』 2023년 가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블루아워

 

저무는 순간이 있으면 피어나는 순간도 있는 가장자리입니다

 

언덕에 있는 의자에 등을 고이고 앉아서

푸르스름한 빛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배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둠과 빛이 서로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도 옆으로 기우는 그림자 밖으로 당신을 꺼내놓을 뿐입니다

 

돌이켜본다는 건 좋은 거예요 그 시절을 잘 견뎌왔다는 얘기니까요

파랑은 역시 어둠을 좋아합니다

 

짙어지는 파랑 때문에 유적처럼 마을은 가라앉아 가고

세상에 없는 당신이 살아있는 나를 지우는 시간입니다

 

걱정 말아요 저에겐 일용할 엄마의 안부가 있으니까요

 

슬픔이 잠시 멈춰서 고여 있는 어느 성운의 시간입니다

특별했던 일상이 보편적인 추억이 되고 마는 순간입니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버린 느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은

기시감에 빠진다는 건 여러 그림자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을 꿈에 묻어줄 시간이 다가옵니다

​​

계간 『시와 정신』 2023년 가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불타는 기린을 보았다

 

불타는 기린을 보았다

꿈속에서

친구는 복권을 사라고 해주었다

길몽이라고

 

불 말고 기린 말이지

화염 속에 갇힌 기린은

꿈밖으로 나올 방법이 없어 보이고

하루 종일 나는

꿈 안쪽의 생각에 잠겨버리고

 

긍정도 없고 경계도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쓸데없이 긴 목은

어디로든 구부러지기 마련이라고

 

꿈에서 일어난 일은

꿈에서 끝장을 보아야 할까

 

동물원을 찾아간 저녁

초식동물이 사는 울타리로 들어갔어

뿔남천 가시 잎을 내밀자

내 쪽으로 다가오는 잿빛 기린

 

그을린 주둥이 사이로

긴 혀를 내밀고

천천히 가시잎을 씹어 먹는다

 

먹구름은 예정되어 있고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 위로 쏟아지려하고

 

풀을 다 먹은 기린이

손목을 핥는다

손목을 지나고

팔을 지나서

어깨를 타고

나를 삼키려는 순간

 

눈을 떴다

바깥의 안부를 전해주듯 들려온 아버지의 부음

 

꿈은 나와 한 편이 되어준 적이 없다

 

그래도 꿈을 팔 수가 없어

꿈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서

풍경 하나가

전소될 때까지

남김없이 타올라야 할 것 같아서

월간 『모던포엠』 2023년 11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 하류에서 일어나는 일

 

가랑잎 하나가 흘러갈 때

상류는 상류답고 하류는 하류다워야 해

물결에 흔들리는 잎은 위태로워 보여야 하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무들의 풍경은 평화로워야 해

 

물줄기가 넓어지는 곳에서

젖은 양말을 빨고 있었지

진눈깨비가 내리는 강가에서

빨갛게 언 주먹으로 차가운 물을 부수었지

어디까지가 상류고 어디까지가 하류냐고

묻는 너에게

여긴 처음부터 하류야, 하고 말해주었지

울리고 싶었어

물결에 찢어지는 얼굴을 보고 싶었어

 

그날 저녁,

꺼져가는 노을이 붉은 다리 위에 걸려 있던 걸 기억하니

 

바다로 가기 직전이 하류라서

너는 울지 않았지

부딪히고 싶어도 더는 부딪힐 곳이 없는 자리라서

버려진 양말의 모래를 털어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지

내게 속삭이던 네 얼굴 선명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기 전에

초승달이 다리 밑으로 자맥질하기 전에

너는 말했지

이제 그만

쥐고 있던 생각을 놓아주자고

속도를 버리는 대신에 깊이를 가지자고

 

소름이 돋았어 사정없이 일그러졌어

입동의 날씨 탓은 아니었어

찢어진 건 네가 아니었어

 

검은 이파리가 너의 방식대로 눈앞에서 찰랑거렸지

현기증 이는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며 환한 통증으로 가라앉고 있었지

-계간 『시와 편견』 2023년 겨울호 발표

 


 

 

이미영 시인 / 유령거미

 

 

유령도 폐쇄 공포증을 느낄까요

 

오래 갇혀 있어서 창백한 걸 겁니다 투명한 피가 투명한 혈관을 따라 도는 탓에

휘청거리는 팔다리가 길다고 합니다 누가 보았을까요

귀가 없는데 소음에 시달리고 눈은 많은데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대대로 이어진 그림자의 내력이라고

레이스 짜는 솜씨가 일품이었던 증조할머니가 얘기했지요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그늘의 나이테를 넓혀나갔는데

 

구석에 몰린 후손은 솜씨가 없든지 아니면 관심이 없든지

당분간 식탁 한구석에서 기식할 요량입니다

모서리라고 마다한 적 없습니다 다음엔 어디에 일회용 텐트를 쳐야 할까요

접시 한 귀퉁이에 앉아 석양을 받으며 졸고 있습니다

먼지처럼 연기처럼 현기증이 반짝거리는 날이에요

 

방해가 된다면 미안합니다

어둠을 가위질해서 불면의 덫을 놓는 일이

자다 일어나 서성거리는 당신의 발목을 노리는 일이

 

귀잠, 꽃잠, 한잠, 속잠…… 깊은 잠은 이렇게나 많은 이름을 가졌는데

불면은 왜 하나의 이름만 갖고 있나요

 

밤마다 당신의 머리를 나의 주머니에 넣고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하는데

말해봐요

아직도 내가 당신에게 기생하고 있나요 아니라 해도 거듭 미안합니다

잡히지 않는 밤의 실루엣이어서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될 수 있는* 정체불명이어서

베개를 빠져나와 필라멘트가 있는 천장으로 기어 올라갑니다

외줄에 매달려 뛰어내린 커튼의 뒷면이 오히려 아늑하네요

거기까지입니다

탈출은 요원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탈피가 더 남았을까요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먹지 않아도 굶어죽지 않는

나는 육체와 영혼의 영원한 후일담입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5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 구의 풍경

 

 

 얀테라는 마을을 아십니까 몰라도 괜찮습니다 아는 척 하면 되는 곳입니다 실존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허구의 마을이니까요 이 마을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은 모두 열 가지입니다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양말을 뒤집듯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모든 것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러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규칙을 낭독할수록 가슴이 벅차오르고 머릿속이 환해져 속이 울렁거리는군요)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당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규칙은 문맥에 따라 이해되고 낭독은 기술이 필요합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신은 당신이 실수하기를 기다립니다 그것은 행동의 실수가 아니고 마음의 실수입니다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해골은 모두 비슷한 형태이고 신생아 또한 모두 비슷한 얼굴입니다 우리는 비슷하게 태어나서 비슷하게 사라지는 생명체가 맞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주장하더군요 지구를 제외하고 우주에 외계생명체가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요 빅뱅 이론에 따르자면 말이지요 정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결말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우주는 오로지 구의 풍경을 사랑합니다

 

월간 「모던포엠」 2024년 5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 편의점 라이프

3분 30초만 기다려줄래요

그러면 편의점 구석진 코너에서도 충분히 뜨거워질 수 있어요

폭설이 내리는 막막한 날에도 아름답게 익어갈 수 있다니까요

 

허기진 추위를 달래는 동그란 은박 뚜껑의 힘

앙다문 입술과 컵라면 입구를 동시에 열면

일회용 면도기를 사다 달라는

집에서 기다리는 애인쯤 잊을 수 있어요

로맨틱 드라마와 대설주의보 사이

짧은 대출 광고가 지나가는 저녁

한겨울에 피는 붉은 포인세티아가

판매대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네요

저 타오르는 사랑처럼

짝을 맞춘 이 나무젓가락처럼

나도 애인과 함께 환한 봄을 향해 행진할 수 있을까요

올라버린 월세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요

후루룩!

씹지도 않은 1인분이

캐럴을 따라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편리성을 전전하며 살아왔어도

도무지 편해지지 않는 나와 애인의 생활

헐렁한 추리닝 같은 그를 이젠 벗어야 할까요

아니면 나를 벗어 버릴까요

라면 국물 때문에 속이 쓰라려요

밤하늘의 눈발은 점점 굵어지는데

오, 인스턴트의 신이여!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배신한 적이 없어요

꺼져버린 가로등 밑

원룸으로 가는 발자국 위로

눈이 내리고 있어요

신이 쏟아버리는 침묵처럼, 끝없이, 끝없이…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 허밍

 

 

어쩌면 물고기의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유희처럼 사람들의 입모양에 관심이 많았지요

오므렸다가 벌어지는 입술에서

당신의 은밀함이 헤엄쳐 나오길 기다렸어요

 

그렇기에 마스크를 쓴 얼굴은 슬퍼 보여요

 

몸 안은 고요한 동굴 같아서

웃음과 눈물에 녹아든 목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석순처럼 자라났지요

 

무성의 시대로 돌아갔을까요

귀를 잃은 침묵이 당신인지 나인지조차 알 수 없네요

 

웅크리고 있는 것들은

눈먼 그리움이거나 야행성 고독이겠지요

낮이 되어도 텅 빈 입만 끌어안겠지요

 

쩍쩍 갈라진 혓바닥으로

이제 허밍만을 날릴 수 있다 했나요

무너지는 힘으로 버티는 거라고 했던가요

 

아직은 누구의 입도 보이지 않지만

상상만으로도 허밍은 충분해요

귀속까지 들어선 실골목으로 내밀함의 공명이 채워진다면

나를 진동시키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노래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허밍은 작아도 듣기 좋을 거예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에게 밀착되어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건 사랑의 역설인지도 모르겠어요

 

계간 『포엠포엠』 2022년 가을호 발표

 

 


 

 

이미영 시인 / 당신은 어디를 통과한 날씨입니까

 

 

지상에선 당신을 날씨라고 부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당신은 물방울과 바람 사이를 산책합니다

구름은 저마다 할 말이 있다는 표정입니다

지금 막 도착한 감정과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건 벽에 달력을 걸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날씨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우울한 당신은 과연 당신일까요

그 또한 고민해 볼 자세입니다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점점 눈높이가 같아진다면

당신들은 서로 입을 맞출 수도 있겠지요

 

오늘은 당신 얼굴 가까이에 무지개가 떠올랐군요

이 또한 잠시 후면 사라지겠지만

부재 속에서 오래 잠들어야 하는 슬픈 감각일 겁니다

 

바람이 조금씩 날씨를 거슬러 나아갑니다

날씨가 당신을 빗겨가고 있습니다

화창한 당신은 슬픈 날씨를 고백하지 않을 겁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우울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우수에 젖은 날씨는 늘 대지와 가까워지려 합니다

 

당신의 날씨는 매일매일 연재 중입니다

단 한순간도 미루거나 멈춘 적이 없습니다

 

계간 『포엠포엠』 2022년 가을호 발표

 

 


 

이미영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2019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등단. 안정복문학상 은상 수상.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 2020년 경기문화재단 문학-유망, 우수작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