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필 시인 / 어머니의 이명
팔순 노모 귓속에는 매미 한 마리 살고 있어 시시때때 매암매암 한없이 울어댄다 어머니 삭이시던 한숨 매미를 키운 걸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있었으랴 포말처럼 왔다 가는 십 남매 텅 빈 자리 허한 맘 대신 울어줄 친구로 삼았을까?
“매미 소리 안 들리면 얼마나 좋겠노” 힘없는 가락되어 가을 강을 울렁이네 매미야! 떠나가주렴. 만산홍엽 지기 전에
김연필 시인 / 광장
나의 문법으로 걸음을 걸어 본다. 나의 문법에서 나오는 걸음을 바라본다. 나의 문법은 나처럼 천천히 걷는다. 나의 문법은 나처럼 흔들리며 걷는다. 나의 문법의 걸음을 조용히 따라가 본다. 나는 지금 나의 문법을 따라가고 있고 나는 지금 나의 문법을 상상하고 있다.
나는 나의 문법으로 생긴 걸음이다. 나는 나의 걸음으로 생긴 마음이다. 나는 나의 마음으로 생긴 계산이다. 나는 나의 문법을 계산하며 조금씩 걷는다. 나는 나의 계산을 상상하며 조금씩 걷는다. 상상 속에서 나의 문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걷는다. 조금 걷다 보면 모든 길이 보이고, 모든 문법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김연필 시인 /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시를 쓰기로 하자. 장소를 정하자. 왕십리 답십리 어떨까, 사람이 나오고, 사람이 움직이고
네 사람이 있어.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화려하고 그건 사람 A, 또 사람이 있어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없고 마네킹 아니고 근데 마네킹처럼 슬퍼. 그건 사람 B, 말고도 사람 C, 또 사람 D.
네 사람 왕십리에 서고, 아마도 광장, 아마도 지름길, 아마도 굴다리
광장에 선 사람 A, 치마를 입었어. 걸어. 모르는 방향. 모르는 얼굴 사람 B는 역사로 들어가. 옷가게에 서. 마네킹 아니고. 근데 마네킹처럼 슬퍼 말고도 사람 C. 웃어. 웃으며 돌아. 빙빙 돌아갔다 돌아왔다. 이제 사람 D 남았어.
그래도 시를 쓰기로 하면 시를 써야 하니까
사실은 사람 넷 모두 왕십리, 광장, 옷가게, 다들 옷가게, 다들 검은 옷
사람 A는 굴다리로 가고 싶어 해. 굴다리에 가지 못해. 옷가게에 있어야 해서 사람 C는 옷가게에 가고 싶어 해. 사람 C는 무슨 옷을 입은지 몰라. 무슨 옷을 입혀야 할 텐데 사람 B를 보면서 옷을 생각해. 슬픈 옷. 옷이 슬펐으면 좋겠다. B는
마네킹이었으면 좋겠다. 광장에 굴다리에 옷가게에 마네킹으로 서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웃어. 모자를 써. 모자는 우스워. 사람 D는 나오지 않아. 굴다리가 없어서. 옷가게에 없어서. 광장에는 시계가 서 있어. 사람 D는 달아나는지도 몰라. 광장 위에 꽃나무가 서 있어. 사람 뒤에 꽃나무가 서 있어.
사실 A는 나야. 슬퍼. 치마를 입었어. 걸어. 어디로 걷는지는 모르고. 거울을 본 적 없어. 내 얼굴을 몰라. 머리가 화려하다. 몰라. 나는 다 몰라.
B는 나야, 왕십리의 나. 치마를 입지는 않았어. 마네킹이 아닌데 옷가게에 서 있어. 한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마네킹 바라보고 있 어. 사실 안 슬퍼. 마네킹 아닌걸. 머리가 없어. 없어도 되잖아. 토르소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어. 잘 썩지 않아. 열에 약해. 웃지 마. 이제 진지해. 여기는 왕십리야. 시를 써야 해. 나는 다 몰라.
C도 몰라. D도 몰라. 지금은 봄이래. 봄도 몰라. 웃지 마. 머리가 없어도 나는
C는 너라고 해보자. 그래도 돼. 사실 너 몰라. 너를 만난 적 없어. 그러면서 너를 사랑한다고 해. 그래도 돼. 사실 사랑 몰라. 왕십 리 몰라. 마네킹 몰라. 토르소 몰라. C도 D도 몰라. 아는 것 없어.
존재의 깊은 거짓말을 하자. 사실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몰라. 뭐 어때? 머리가 화려하고, 치마를 입었어.
이제 D 이야기를 해야 해. D는 말하기 어려워. D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 해. 존재의 깊은 거짓말. 사실 사랑 몰라도. 나는 진지해. 잘 썩지 않아. 울면서 달리기. 광장에서 어디로 갈 수 있을지.
D는 울면서 나왔어. D는 정말 너야. 대화를 하다가 상처를 받았어. 울면서 나와서 택시를 탔어. 집으로 갔어. 집에서 또 울면서 나왔어. 머리가 화려하지 않아. 치마를 입지 않아. 플라스틱이 아니야. 왕십리에 온 적 없어. 굴다리는 좋아해. 굴다리에 앉아 엉엉 울고 있어. 존재의 깊은 거짓말이야. 모르지만 사랑한다 해볼래. D야 너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D야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D야 너는 위로를 받았으면. 플라스틱 굴다리 아래 선 레고 인형에 대고 말해. 그런 레고 있을 거야. 광장이 있고 꽃나무가 있고 굴다리가 있는. 굴다리 아래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플라스틱 네가 있는.
시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시를 쓰지 못했어.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돼. 마네킹 좀 바라보고 있었어. 사실 여기 옷가게야. 봄이래. 봄인데.
사실 사랑 몰라. 마네킹만 바라보고 서 있어. 시 그런 거 안 쓰면 좋겠다고 말했어.
김연필 시인 / 무화과
그곳에는 아무것도 피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꽃도 피지 않고 아무런 웃음도 피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소리도 음악도 피지 않고, 아무런 마음도 새도 피지 않았다. 아무것도 피지 않는 벌판에 아무것도 아닌 다리가 놓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간다. 다리 너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아무것도 피지 않은 아름다운 숲이 있고, 아무것도 아닌 고장난 기계들이 영원히 피지 않을 꽃들을 돌본다. 사람이 끝없이 닿아도 영원히 피지 않을 꽃이 있고, 사람은 끝없이 다가간다. 꽃이 피지 않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불행한 사람들이 다가간다.
―계간 『시와 세계』 (2012년 겨울호)
김연필 시인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뉴욕으로 간다. 파리로 간다. 오래된 불탑이 있는 파리. 파리에 서면 붉은 광장의 젊은 시인이 보인다. 뉴욕이다. 뉴욕에 서도 보이는 붉은 불빛. 뉴욕에서 보이는 참치잡이 어선들. 참치잡이 어선들을 따라 남해안으로 간다. 남해안이다. 어디의 남해안인지 모른다. 파리의 붉은 광장이 보인다. 붉은 광장 아래로 어부들이 보인다. 어부들이 헤엄친다. 어부들을 따라 강변으로 간다. 어느 강인지는 모른다. 강변엔 이름모를 고기들이 헤엄치고 이름모들 새들이 사냥을 한다. 이름모를 새가 된다. 오래된 불탑이 된다. 오래된 불상이 된다. 오래된 불란서의 새끼고기들이 된다. 헤엄친다. 헤엄치고 또 헤엄친다. 런던에 닿을 때까지. 런던에서 웃고 있는 본존불의 웃음을 볼 때 까지.
김연필 시인 / 천문
유리로 된 달빛 같은 밤, 달빛으로 된 거울 같은 밤, 거울 속에 비친 어두운 밤, 밤의 너머에 비치는 어떤 밤. 어떤 유리로 된 밤, 어떤 유리로 만든 밤, 어떤 유리를 만든 밤, 어떤 유리로 남은 어떤 밤. 어두운 밤. 유리로 된 달빛 같은 밤, 달빛으로 된 거울 같은 밤, 밤으로 된 겨울 같은 밤. 겨울로 된 밤. 겨울에 비친 밤. 겨울 속에 남은 어떤 밤. 어두운 밤. 유리된 달빛 같은 밤. 해가 없는 밤. 해가 없이 빛나는 밤. 밤마다 사라지는 밤. 밤의 멀리로 사라지는 그 어떤 밤. 그 어떤 밤의 조각 같은 어떤 유리 같은 어떤 달빛 같은 어떤 조각만 남은 어떤 밤. 모든 밤. 모든 밤이 서술되는 밤. 모든 밤이 서술되는 어떤 유리로 된 거울에 비치는 밤.
김연필 시인 / 보르헤스
멀리 어떤 땅에는 큰 뱀이 산다. 물 위를 기어다니기도 하고 땅 위를 기어다니기도 하는 큰 뱀. 큰 뱀은 언제나 배를 붙이고 미끄러진다. 한시도 배를 떼지 않는다. 큰 뱀의 배는 얼마나 차가울까. 큰 뱀의 배를 만지면 얼마나 차가울까. 큰 뱀은 멀리 강을 건너기도 하고 나무에 오르기도 한다. 나무는 큰 뱀을 지지한다. 조금 무거운 게 아닌데... 나무는 큰 뱀을 지지하며 큰 뱀의 차가운 배를 만진다. 큰 뱀은 그럴 때면 조금씩 커지고, 조금씩 더 커지고, 커지다 못해 멀리 바다 건너까지 떠나버리기도 한다. 나는 큰 뱀의 이름을 알고 큰 뱀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여기서 보이는 건 큰 뱀의 마음뿐이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선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병철 시인 / 하늘 우체국 외 6편 (0) | 2025.11.15 |
|---|---|
| 이인평 시인 / 여인의 눈물 외 6편 (0) | 2025.11.15 |
| 최두석 시인 / 그 놋숟가락 외 6편 (0) | 2025.11.15 |
| 이우림 시인 / 뼈만 있는 개 외 6편 (0) | 2025.11.15 |
| 양성우 시인 / 시여 노래여 외 6편 (0) | 2025.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