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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 시인 / 그 놋숟가락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굽이굽이 오솔길 안내하던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칭찬도 했지
이어서 저녁 먹는 시간 나는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금례 누님 자리의 숟가락을 몰래 얼른 입속에 넣고는 놓았네
그녀의 이마처럼 웃음소리 환하던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이 그 숟가락으로 스스럼없이 밥 먹는 것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았네
지금은 기억의 곳간에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놋숟가락 짚수세미로 그리움과 죄의식 문질러 닦아 눈썹의 새치도 비추어보는 놋숟가락
최두석 시인 / 길
세상 모르고 당당히 가던 길 있었지 가파른 비탈이지만 의연히 걷던 길 있었지 사명감에 골똘히 앞만 보며 치닫던 길 있었지 외로움에 칡뿌리 씹으며 터벅거리던 길 있었지
이제는 되짚어 갈 수 없는 그 길들 가시덩굴 우거진 풀숲에 숨어 있지
최두석 시인 / 경주남산 할매부처
아마도 석공의 어머니가 모델이 아닐까 웃고 울며 한세월 살아본 아이도 두엇은 낳아 길러본 여인네의 표정이 살아있다 그 손맛으로 무친 나물 백반 한 상 간절히 얻어먹고 싶다 시고 떫고 달고 맵고 짠 세상살이의 맛을 칼로 자르듯 끊어내기보다 두루 보듬어서 우리고 삭히는 부처가 있다는 게 고맙다.
최두석 시인 / 시인
물길은 말길과 통하고 말길은 숨길과 통한다
물길이 제대로 열려야 모든 생명이 고르게 숨쉴 수 있다
말길이 제대로 열려야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
우리 몸 어디에 생채기가 나도 피가 스며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디나 몸속에는 실핏줄이 통하고 있다
세상의 물길과 말길과 숨길은 몸속 핏줄과 통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시인이란 자신의 말길을 열어 세상의 물길과 숨길과 은밀히 소통하는 자이다.
최두석 시인 / 가천 암수바위
남해도 가천마을에 가면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다랑이논 사이로 만삭의 암바위를 거느리고 근사하게 잘생긴 수바위가 무람없이 불끈 서 있는데 예로부터 착박한 땅에 뿌리내린 섬사람들이 무엇을 빌었는지 증언하며 서 있는데
이 바위가 영험한 숨은 이유는 파도가 은근히 뒤설레는 밤이면 바다로 내려가 앞물을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멸치 새우 가자미 등이 떼 지어 몰려와 다투어 산란을 하기 때문이란다
최두석 시인 / 탱자꽃
내 하는 짓 못마땅하여 마음 속에 가시를 세우는 이여 그대와 나 사이의 울타리에 탱자꽃 피네 촘촘한 가시 틈새에서 젖빛 뽀얗게 흐르는 꽃이 피네
가시를 피해 너울너울 호랑나비 날아와 춤을 추다 알을 낳네 탱자잎 먹고 살진 애벌레 무럭무럭 자라 번데기가 되고 다시 호랑나비 되어 날아오르네
내 하는 짓 못마땅하여 마음속의 가시를 벼리는 이여 그대와 나 사이의 울타리에 탱자가 익네 촘촘한 가시 사이에서 탱탱한 탱자가 금빛 향내를 풍기네.
최두석 시인 / 지장보살을 먹다
곡식이 귀한 두메산골 아낙들에게 나물은 보살이었나 보다 하여 풀솜대를 지장나물이라 불렀나 보다
가시로 찌르거나 삶고 우려도 독이 잘 빠지지 않는 질긴 나물도 많은데 날로 씹어도 부드러운 풀솜대는 나물로 보릿고개를 넘던 이들에게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온몸을 던져 중생을 구한다는 지장보살로 보였나 보다
산길을 가다 풀솜대를 꺾어 풋풋하게 싱그러운 맛 음미하며 나물 먹고 보살 부르는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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