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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건희 시인 / 우산의 방향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5.
김건희 시인 / 우산의 방향은

김건희 시인 / 우산의 방향은

 

 

아버지 이마주름같이 구겨진 우산

물음표 방향을 알지 못해 허둥거리다

퍽 소리 나게 펼쳐 들고 싶었다

 

모서리까지 팽팽해지겠다는 오늘의 운세는

안과 밖에서 보는 비의 차이처럼

달려오는 빗물 단숨에 받아내고 싶었다

 

우산 쓴 누군가가 좁은 골목길을 마주 걸어올 때

우산 접지 않고 비켜갈 방향은

한쪽이 더 높이 우산을 들어주어야 한다

 

날씨까지 변덕스럽기라도 한다면

먹구름에 스펙을 쌓았다 해도

바람에 날리지 않게

손잡이를 꽉 움켜쥐어야 한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비바람에

자기소개서 들고 돌진하는 온몸

흐린 하늘 흐린 나라 빙빙 돌리고 싶다

 

 


 

 

김건희 시인 / 물의 독법

 

 

침묵하는 뱃전 살빛 푸른 바다가

저인망 그물에 끌려 나온 어린 물고기를

되돌려 달라고 한다

 

바다의 말 알아듣는 아바지는 물의 독법에 순응한다

 

그대 아니면 안 되겠다고, 같이 가야 할 길이 있노라는

첫 줄부터 말문이 막히는 견고한 백서는

아버지의 전부였던 것

 

닳은 지팡이 잡은 손

떼로 몰려 밤을 지나온 바람에 검게 흔들려

조금씩 수평선을 허물고 말았다

 

동색의 물고기들 헤엄치는 물 밑 경계에서

바위에 부딪힌 뱃머리 얼마나 이마가 아팠을까

 

사방으로 흰머리칼 날려도

몸안의 그림자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바다는

링거줄에 흘려 넣은 출렁임으로

천 길 물속 암초의 맥박을 재고 있다

 

-시집 『감응의 구간 』 (형상시학 10집)‘

 

 


 

 

김건희 시인 / 적천사 은행나무

 

 

황금갑옷 갈아입고 달려 나갈 발굽

조련된 군마처럼 서 있다

 

열두바퀴 지구를 돌아

천왕문 밖 서역에서 돌아온 듯한 몸통

 

왕관 쓴 이서국 후투티가 드나드는 구멍

헐거워졌다

 

노랗게 깔이 둔 깃발 자락 위로

젊은 말을 갈아타지 않았다는 거짓말들

농익어 떨어지는 쿰쿰한 땅

 

공중의 불평들 고스란히 받아 주고 있다

 

부동의 몸짓 800년에 손을 대면

복속을 견딘 이서국 군마

발굽 냄새 물컹하다

 

 


 

 

김건희 시인 / 포스트잇

 

 

뒤숭숭한 봄, 너의 잰걸음에 놀라

안부를 얼른 봉인한다

 

크기와 무게가 바닥나기 전

뒤꿈치 들고 계단을 오르듯 숨을 고른다

 

없는 비밀을 민들레 꽃잎에 쓴다

 

노랑이 노랑에 그려내는

엇비슷한 밑줄의 감정들

 

순간들은 모두

어디든 척척 붙고 싶어 하는

뒷면이 찰진 나이 이니까

 

높거나 낮거나 모서리라도 좋다

 

밟아도 피어나는 후렴구처럼

직선이 곡선으로 바뀌는

 

하염없는 기다림이다

 

 


 

 

김건희 시인 / 나빌레라

 

 

욕망 잠근 안전핀을 나빌레라라 부른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가면무도회에서

검은 날개가 돋기 시작하는 순간은

밖의 얼굴에 묻힌 안의 얼굴이 지워질 때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어둠에 들어

환한 밤을 찾아 헤매던 불면

붉은 양탄자 보푸라기는 발목까지 자라나서

살아온 어디나 풀밭이 된다

 

착각은 늘 바닥에서 또 날개가 돋는다는 것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둔 잿빛 정장

튀어 오른 샴페인은 화살촉이 될 수도 있다

 

감정도 고백도 없이 희미해지는 알몸

불빛을 한 입씩 베어 마신 목젖들은

모래시계가 되어 뒤집힐 때

공중 부양하는 미엔나 왈츠 앞에서

우리는 형형색색의 나빌레라

 

세로줄의 낙서를 가득 품은 입술로

부르르 떨리는 안전핀 당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의 골이 깊다

 

-시집『감응의 구간 』(형상시학 10집)

 

 


 

 

김건희 시인 / 휘파람 기도

 

 

수선집 가위는 분주했다

 

하루가 모래언덕처럼 구겨진다 해도

제단 앞에서 나는 마냥 뒷걸음칠 수 없다

 

곧 쓰러질 것 같아도 비틀비틀 걸어야 하는 것은

익숙해진 바람의 보행 습관

등짝에 얹은 한 모금 물도

여기까지 지고 왔으니

고요히 내려놓는 성전 앞의 고단함

 

나에게 나를 허락하는 휘파람으로

눈 큰 낙타를 부른다

 

사막을 건너 집으로 돌아갈 때는

홀가분해야 했으므로

골목길 끝에 오아시스를 오려 붙인다

 

 


 

 

김건희 시인 / 바닥엔 바닥이 없다

 

 

바닥에 떨어지면 닿는 바닥은

멀고도 가깝지

 

바닥은 바닥을 볼 수 없다

 

단단한 바닥일수록

깨지는 아픔은 크고

 

우뚝 멈추는 곳에서

금세 튕겨 올리는 스프링

 

햇살 비켜 간 골목길로 떨어졌을 때

푹신하게 받아 주는 바닥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슬그머니 사라지는 바닥

 

피멍 곱씹은 땅

이슬 내린 뒤에야 들국화가 스르르 일어나는 걸

바닥 없는 바닥에서 알게 됐지

 

-시집 <오렌지 낯선 별에 던져진다면>에서

 

 


 

김건희 시인

전남 광주 출생. 2018년 제3회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최충문학상 산림문화공모전 수상. 현재 대구문인협회회원, 형상시학회장. 시집 <두근두근 캥거루>. 공저<시인의 파라다이스 문집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