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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본 시인 / 허공의 말씀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말씀으로 깨어나는 나날이다
너와 나 사이, 나무와 숲, 빌딩과 하늘의 스며들 수 없는 사이에서 잠들어 있던 그리움이 말씀으로 깨어난다 눈물이 웃음을, 잊힌 이별을 깨운다. 깨어난 그리움의 말씀으로 그리움을 지운다 깨어난 사랑의 노래가 사랑을 지운다 끼리끼리 나누는 말씀으로 서로를 지우더니 스르르 새벽하늘의 별빛처럼
허공으로 스러진 다음
빛과 어둠 사이, 허공의 침묵이 비로소 조금씩 들려온다.
빛과 어둠 안에 태초의 침묵이 있었나니 허공의 그 말씀이 나를 깨우고 있다.
구석본 시인 / 고독의 얼굴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이력서를 내야 했다 그대 정면에서 보여주는 무기력한 표정, 고양이의 몸짓, 각질이 된 분노, 진면목(眞面目)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이제 이력서의 나를 지우는 시간, 비로소 내가 보인다 아침이면 머문 자리를 지워서 허공이 되는 달과 별, 노을 너머 제 홀로 깊어 가는 어둠, 오오, 저무는 삼라만상의 맑고 푸른 그늘이 우주의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처음의 진면목이 안에서 떠오른다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빛처럼 뼈대만 남은 나의 얼굴이 보인다 고독의 자화상이 내 안의 백지에 서서히 그려진다.
2023년 시산맥 여름호 발표
구석본 시인 / 무덤
가을날 오후 산을 오른다. 길옆 무덤 하나가 낙엽으로 쌓여 있다. 그러고 보니 무덤에는 낙엽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 쌓이고 오늘 아침 사라진 이슬도 쌓여 있다. 개미 두어 마리 무덤을 오르더니 낙엽 속에 쌓여버린다. 그대와 내가 한때 손잡고 피워 올리던 사랑도 무덤에 쌓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덤가에 잠시 앉는다. 산길을 쉬지 않고 오르던 사람이 낙엽처럼 조금씩 부스러지며 참으로 조용히 아무도 몰래 내 속으로 들어와 쌓이고 있다.
구석본 시인 / 홀로 걷는 산길
산길을 홀로 걷는다.
오르면 오를수록 은밀하고 부드러운 그리움은 가쁘게 차오르지만 너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바람으로 흐를 뿐, 이름이 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호명하지 못하는 산길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기억의 이름을 되새김질하지만 내 그림자만 숨가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좇아온다.
모롱이 하나를 돌아 산중턱에 오르니 나타나는 이정표, 한길은 정상으로 또 다른 길은 중턱을 휘돌아 하산하는 길이다. 앞서가는 사람이 중턱 길로 떠나며 동행을 권하지만 나는 등을 돌려 정상으로 향한다. 누군가가 걸었던 길을 나만의 길이 라고 단호히 우기면서 어려운 길을 걸어야 무엇이라도 남길 수 있다고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찍어보지만 뒤돌아보면 어느새 부스러진 낙엽이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남기고 지우고 다시 남기고 지워, 숲이 되고 길이 된 것을............
저물 무렵 정상에 올라서자, 먼 들녘의 어둠 속으로 발자국을 남기면 걸어가는 내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나를 지워가는 것이 보인다.
구석본 시인 / 중심의 정체
갈비탕을 먹는다 갈비를 뜯는다 그래, 갈비는 뜯는다고 한다 몸의 중심을 뜯는 것이다 한 몸을 지탱하던 중심을 뜯으며 맛있다고 한다 갈빗살은 질기다 그 질긴 살을 씹을 때 몸이 숨겨 놓은 욕망이 끈끈한 국물로 흐르며 목젖을 적신다 죽은 욕망은 살이 되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며 또 다른 욕망으로 살아난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게 살아나 내 몸의 중심으로 스며들어 일어난다 몸속에 숨겨진 뼈 하나가 더욱 단단하게 굳는다 국물도 한 모금 마신다 갈비의 육수, 땀으로 흐른다 마침내 그릇은 비워지고 뼈만 남는다 눈앞에 드러난 한 생을 떠받친 중심의 정체, 잠시 머물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현대시학, 2007년4월호>
구석본 시인 / 풍선인형의 노래
내 안에서 일어난 바람이다. 허공이 길이고 길이 허공이었던 바람, 나무와 풀의 골짜기에서 울부짖던 야성(野性)이 탄력을 가진 껍질이 되어 통통 튀어 오르며 내 안에서 허공의 길을 찾는다.
나의 춤과 노래와 눈물이 바람의 길이다. 껍질로 펄럭이며 부풀어 오르는 나의 몸, 어둠으로 팽팽한 정신 하나를 허공 쪽으로 밀어 올려 보지만,
바람의 춤과 노래와 눈물은 허공의 길로 이어지고 그 길 또한 먼 허공으로 깊어질 뿐이다
이윽고 밤의 어둠이 나무와 풀의 골짜기로 떠날 무렵 누군가 내 생에서 바람을 뽑는다. 내 몸이 착착 접혀진다. 허공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시집 『고독과 오독에 대한 에필로그』 (시인동네, 2019)
구석본 시인 / 의성어(擬聲語)의 가을
가을산 나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와 잎과 바람의 몸들이 무너지면서 울리는 소리 쓸쓸, 쓸쓸,
우리가 처음 손잡았던 그해 가을날 저녁 어둠 속에서 무너지던 너의 목소리, ‘사랑한다는 것은 쓸쓸함을 나누는 것이야, 쓸쓸함의 체취를 주고받는 것이야’
이제야 들려온다, 너 안의 쓸쓸함이 내게로 건너온다.
이 가을엔 나무와 잎,나무와 나무,잎과 잎,숲과 하늘의 경계가 쓰으쓸 바스라져 무너진다.서로를 지워서 하나가 된다.존재의 몸들이 무너지고 지워진 다음,하늘의 허공이 내려와 숲이 되고 몸 없는 존재가 명료한 소리로 울려온다.
쓸쓸, 쓸쓸, 쓸쓸,
쓸쓸함이 나무처럼 일어서고 잎처럼 팔랑이고 드디어 눈물처럼 영혼의 계곡을 흐른다.
쓸쓸, 쓸쓸, 쓸쓸, 쓸쓸,
너와 나와 바람과 허공과 나무의 몸들이 무너지면서 울려오는 말씀 이전의 말, 가을의 의성어다.
누군가로부터 이름이 불리는 동안 나는 날지 못한다.
구석본 시인 / 증언
내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가을비를 맞으며 중앙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더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틀림없이 나를 보았다는 그의 음성은 안개처럼 나를 감쌌다. 가을비에 젖은 나의 몸에서 외로움이 쏟아져 한 생의 깊이보다 더 깊은 빗물로 고일 즈음 급기야 방주를 띄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젖은 잎들이 흩뿌려져 있었고 그것은 나의 정체를 추적할 단서였다고 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증언을 인정하고 언젠가 흩뿌려지는 잎들을 흔적으로 남기고 홀연히 떠날 것이라 말해 주었다.
구석본 시인 / 혼자, 꽃을 보다
철조망가시를 감고 넝쿨장미가 꽃을 피웠다
저 꽃, 철조망가시가 뿌리다 . 장미꽃이 향기를 독가스처럼 뿜어내는 5월의 한낮, 햇살 한 줄기, 철조망가시에 걸려 있다 철조망가시가 햇살 속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햇살이 뿌리 깊은 꽃을 피우고 있다.
당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어딘지 모르겠어, 안도 없고 밖이 없는 곳, 처음도 끝도 없는 곳, 구름이 모여 허공 속으로 수많은 가시를 퍼뜨리고 있는 곳 무지갯빛 가시에서 무지개가 솟기도 하는 곳, 날아오르는 새 떼들도 여지없이 가시가 되어 허공 속으로 박히고 있어. 누구랑 있어? 혼자야. 복사된 무수한 혼자. 얼마 후 구름 속으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수많은 가시로 분해되어 마침내 허공 속으로 뿌리 내릴 거야.
당신 말의 가시가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뿌리로 내린다. 내 몸에서 하루 종일 꽃이 피어난다. 무수하게 복사된다. 바람처럼 피어난다. 구름처럼 뭉쳤다 흩어지고 뭉쳤다 흩어진다.
저 꽃, 외로움의 가시가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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