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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대식 시인 / 고래와 시인
저인망 그물에 걸린 고래가 죽었다 익사(溺死)다 그의 몸에 남은 망사스타킹 같은 그물자국에서 선(線)에 관한 몇 개의 보고서를 읽는다 윤리학(倫理學)이 아니다 생의 근친(近親)인 죽음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고래에 대한 내 명상이 길어질 대 시(詩)에 대해 생각해본 것뿐이다 말[言]의 촘촘한 저인망에 걸려 죽어가는 한 시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이란 저와 가장 친근한 곳에서 완성되는법 객사(客死)를 면한 고래와 시인
우대식 시인 / 거림골에 들다
거림에 들어 아침을 먹었다 먼 데서 온 손님들은 바짓단을 양말에 말아 넣고 길을 나섰다 된장에 무친 머위와 간장을 얹은 꼬막 그리고 졸인 청계알과 감자 몇 알 흰 쌀밥을 찬 계곡물에 말아 먹으면 찬란했던 봄날의 꽃잎들이 밥그릇에 떴다 어리석은 사람이 나무 의자에 앉아 젓가락질을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했다 빌며 밥을 먹는다 물통을 지고 산을 오르는 산꾼들은 손을 위 아래로 저으며 어여 많이 먹으라 한다 세석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에 낯을 씻고 오래 들여보면 물속에서 안개와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들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고맙다 오던 모든 길이 끊어지고 온통 돌과 물인 세상에서 의지가지 없는 한 사람 모다 큰 것들이 내려다보며 불쌍하다고 다독일 때 매일매일 밥만 짓다 세상을 떠난 할매의 느리고 찬찬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린 낯바닥을 물로 씻어주던 거친 할매의 손처럼 아무 새로울 것도 없지만 늘 있었던 안동의 누진 사투리로 “어떤노 니 요즘 어떤노” 안부를 물을 때 거림의 모든 꽃들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 시와 징후 2023년 여름호 발표
우대식 시인 / 금팔찌
면사무소 앞 제과점 아이들과 팥빙수를 먹는데 열대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이 유리창 밖에 털썩 주저 앉는다 새로 산 믹서기 한 대를 앞에 놓고 롯데 마트 계산서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땀이 흐르는 손목에 낀 금빛 싸구려 팔찌가 촌스럽게 빛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뚜껑을 여는 순간 한 여인과 두 아이의 사진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아버지였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오렌지를 갈아 아이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얼음을 갈아 아이들과 맛있는 팥빙수를 먹었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열대의 야자수 나무에 코드를 꽂고 그는 수도 없이 믹서기를 돌렸을 것이다 그의 팔찌가 순연의 금빛을 띠었다
우대식 시인 / 무애無碍에 관한 명상
개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 손을 핥는다 한참을 그러다가 무애(無碍)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벌판에 내리는 눈 속에 한순간 개의 혓바닥도 내 손도 그나저나 그도 나도 오늘 겨울 강을 건너는 한 마리 짐승이라 생각되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무어라 짖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고 눈 속에 파묻힌 그의 네 발을 핥아보고 싶은 것이다
우대식 시인 / 역입(逆入)
귀가 순해진다는 나라에 도착해 역입(逆入)의 자세로 꿈틀거려본다 머리와 발을 입과 항문의 자세를 바꾼다 발목은 생각이 깊어져 푸른 핏줄이 엉키고 항문은 돈까스를 베어 물고 말을 하는 중이다 십년 맨발로 살았다는 북한산 청담을 생각하면 머리가 시려온다 일생 오물을 내뱉으며 살아온 나의 입이여, 입 주위를 흰 수건으로 닦아본다 한없는 더러움에서 느끼는 다정함 머리에 너무 많은 피가 몰려 있다 힘을 거꾸로 몰아가는 붓질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귀란 장딴지에 난 상처 정도일 뿐 두 발을 머리에 이고 걷는 중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우대식 시인 / 유배流配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히고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울겠네 며칠 말미를 낸 그대가 온다면 밥을 끓이고 대나무 낚시를 하며 서로의 글을 핥고 빨겠네 글이란 무섭고도 간절하여 가시나무를 뚫고 천둥처럼 울릴 것이라 믿고 그대의 글을 읽다가 온통 피로 멍울진 내 혓바닥을 보겠네 유배의 길에 떨어져 흩어진 몸을 살뜰히 아껴보겠네
-시인동네 2020년 4월호 발표
우대식 시인 / 이력
누가 이력을 묻는다면 내 치욕의 성명서를 보여주겠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었지만 아무도 집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본래의 나는 유령처럼 나타나 가짜의 내가 돌아갈 수 없음을 비웃었지만 나는 크게 결심하였다 나는 간다 내가 도달한 곳이 본래(本來)이다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낯선 두려움에 대한 위로일 뿐 간절함이란 이런 것 한숨 잠이 깨고 나면 달콤한 물을 한 잔 다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실은 팽팽한 활시위에 놓인 내 굴욕의 촉이었음을 고백한다 시위가 끊어지도록 당겼다가 쏘아버린 어느 푸른 창공에서 한 인간의 굴욕이 음각된 것을 선명히 바라보는 삼월의 오전이다
우대식 시인 / 생각의 정거장에서 보내는 엽서
마지막 꽃잎이 지는 오월 저녁 블랙 사바스의 체인지 바꾸고 싶다 이 끝과 저 끝 사람과 짐승 뒤바꾸어 놓고 술 한 잔 여보세요 여기가 저쪽인가요 이쪽인가요 지구는 여전히 아름답지요? 이방의 별에서 도착한 엽서 신은 죽었다 이 사람을 보라 생각의 정거장에서 오랫동안 버스를 기다립니다 낮술은 왼쪽 뇌를 물어뜯어 두 눈을 충혈시키고/ 붉다, 붉은 금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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