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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참 시인 / 지난여름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4.
김참 시인 / 지난여름

김참 시인 / 지난여름

 

 

천둥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슬레이트 지붕에서

빗방울이 끝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무들은 흠뻑 젖었고 비 맞은 비둘기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거실 피아노의 하얀 건반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 귓속으로 음악이 흘러들어왔다

 

생선 뼈다귀를 문 검은 고양이들은

지붕과 지붕을 뛰어다녔다

 

시계탑에서 열한시의 검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비에 젖은 청년이 공원을 향해 힘껏 뛰었다

 

나는 방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천둥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무들이 흠뻑 젖었다

 

 


 

 

김참 시인 /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간다.

 

 


 

 

김참 시인 / 은행나무숲으로 가는 기린

 

 

 창밖에 기린이 나타나 귀 쫑긋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음악을 듣는다. 저녁마다 커다란 기린이 나타나 안테나처럼 귀를 세우고 내가 틀어놓은 옛날 음악을 듣는다. 나는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기린에게 건네준다. 기린은 사과를 꿀꺽 삼키며 크고 순한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사과 하나를 더 건네주며 사과 씹는 기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린 머리에 달린 딱딱한 뿔을 올려다본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바람이 분다. 기린은 몸을 돌려 은행나무숲으로 돌아간다. 숲으로 가는 길엔 작고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기린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집들의 심장에 주황색 등불이 켜지고 커다란 발자국이 숲으로 이어진 길 위에 뚜렷이 새겨진다. 숲과 집들과 나무들과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들 점점 작아지고 기린의 몸집은 점점 커진다. 회색 구름이 기린의 목에 걸린다. 남자와 여자가 잠든 작은 방 창문 밖으로 기린이 지나간다. 은행나무 잎 녹색 빛깔 점점 짙어지는 여름밤, 은행나무숲에 앉아 있는 연인의 등 뒤로 기린이 지나간다. 아니, 기린 지나가는 소리 들린다. 조용히 비가 내린다. 은행잎들이 가만히 떨어져내린다.

 

 


 

 

김참 시인 / 기린

 밀밭에서 놀던 기린이 우리 집으로 온다 마늘밭 지나고 도랑 건너 돌무더기와 대밭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긴 목 위에 있는 기린의 얼굴을 본다 참 슬픈 얼굴이다 보리밭에서 놀던 기린이 돌담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대문 앞 텃밭에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를 넝쿨째 뽑아 먹으며 기린이 온다 밭에서 잡초 뽑던 이모가 고개를 들어 슬픈 얼굴의 기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대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당근과 가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위로 새털구름 흘러간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기린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올라와 구름을 향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연기를 꿀꺽꿀꺽 삼킨다

 

 


 

 

김참 시인 / 열대의 밤

 검은 항아리 머리에 이고 검은 얼굴 여인들 걸어가는 열대의 밤 노란 새들 나무에 앉아 커다랗게 지저귀고 어두운 하늘에 뚱뚱한 구름 흘러가는 밤 하얀 도마뱀들 벽 타고 내려와 바구니의 망고를 갉아먹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강가 모래밭에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강에 들어가 파란 물고기 건져 올리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바오바브나무 아래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숲에서 초록 뱀을 잡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검은 항아리에 파란 물고기와 초록 뱀을 담아 어두운 오솔길 따라 돌아오는 밤 노란 달 공중에 떠올라 뜨겁게 타오르고 검은 바람이 뚱뚱한 구름을 밀고 언덕을 넘어가는 밤 잠 못 드는 내가 도마뱀처럼 벽을 타고 지붕에 올라 뜨거운 달빛 받으며 무화과 열매처럼 검은빛으로 익어가는 밤

 

 


 

 

김참 시인 / 양평

 

 

 삼십 년 전 가보고 한 번도 간 적 없는 양평. 너무 오래전 일이라 무슨 훈련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꽤 먼 길이었다. 선임들도 많았는데, 얼떨결에 1호 차에 탄 날. 운전병들은 알았겠지만,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던, 그날 새벽 날씨처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1호 차 뒤엔 3호 차, 그 뒤엔 4호 차와 5호 차, 그 뒤로 이어진 군용 트럭과 장갑차, 전차의 긴 행렬. 여단장이 앞에 타고 있었지만, 뒷좌석에 앉아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선임병 눈에 띄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캄캄한 새벽이라 안심했다. 졸다 깨다 졸다 깨다 하는데 확성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오래전, 안개 가득했던, 그날 새벽의 풍경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감도 확인을 위한 단순한 체크였지만 졸음이 확 달아났다. 동이 트고 있었고 안개가 흩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국방색 차량의 느린 행렬이 이어지는 길옆, 야트막한 언덕엔 연둣빛 배추밭이 펼쳐져 있었다. 낯설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김참 시인 / 밀실(密室)

 

 

 목 위에 머리 대신 확성기가 달린 우리. 그런 우리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는 질문들. 머리는 어디 두고 오셨어요? 몰라요. 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가 없어졌더라고요. 오디오 수집가도 아닌데 목 위에 확성기를 단 사람이 모여 사는 이상한 단층 아파트. 예? 단층 아파트요? 세상에 단층 아파트도 있어요? 지상부는 단층인데, 지하는 101층이에요. 그럼 주차는 어떻게 해요? 주차요? 나야 모르죠. 나는 차가 없으니까. 아직 어두운 새벽, 식은땀 흘리며 복기해 본 간밤의 꿈. 지하 5층과 14층, 22층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멈추지 않고 추락하던 엘리베이터. 목 위에 확성기를 단 이웃들과 함께 커다랗게 비명을 질러도 끝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엘리베이터. 101층에서도 멈추지 않고 무저갱으로 추락하던 밀실. 서로를 비추는 두 거울 속에서 무한 증식하며, 끝없이 추락하던 사람들. 귀가 터지게 소리 지르는 확성기들로 가득하던, 어둡고 기괴한 방.

 

 


 

 

김참 시인 / 두 개의 나선

 

 

할아버지는 나에게 두 개의 나선을 물려주셨다. 나는 두 개의 나선과 함께 움직인다. 소라고둥처럼 텅 빈 나선. 달팽이처럼 자꾸 내 몸속으로 기어드는 나선. 인적 없는 길을 적시는 빗소리나 나뭇잎 흔들며 우는 바람 소리 같은 두 개의 나선. 아침이면 방울새처럼 나를 깨우기도 하고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흔들기도 하는 두 개의 나선. 할아버지는 나에게 기이한 유산을 물려주셨다. 달팽이의 길, 소용돌이치며 공명하는 길, 자꾸만 울창해지는 미로 같은 길.

 

 


 

 

김참 시인 / 동백숲

 

 

 숲엔 동백나무가 가득했다. 가지마다 붉은 꽃 피어 있었다. 몽롱한 색이었다. 동백숲 너머 반짝이는 바다에서 검은 가마우지 몇 마리 숲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붉은 꽃과 초록 잎사귀 흔들며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끝없이 울어대는 바닷새 소리에 나는 좀 몽롱해졌다. 해안 절벽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가쁜 숨 고른 뒤 만개한 동백을 바라보던 여자. 붉은 동백 한 송이 머리에 꽂고 기이한 노래를 부르던 여자. 숲과 바다로 파문처럼 번지며 만물을 흔드는 그녀의 노래에 취해있는 동안, 습하고 차가운 바람에 떨리는 붉은 동백 꽃송이에 취해있는 동안, 여자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놀랍게도 여자는 바람 탄 새처럼 두 팔을 펴고 공중에 가만히 떠 있었다. 동백숲 곳곳에서 검은 가마우지들이 솟아올라 그녀를 따라 날아간 뒤 바다 너머에서 희미하게 달이 돋아나고 있었다.

 

 


 

 

김참 시인 / 이천년

 

 

 집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언덕에는 고인돌이 있었다. 나는 삽을 들고 미루나무들이 서 있는 고인돌 앞에 도착했다. 고인돌 위로는 노란색 별들이 무섭게 날아다녔다. 나는 고인돌 밑을 파나갔다. 땅 밑에서 잠을 자던 구렁이들이 언덕 아래로 달아났다. 바람이 불자 언덕 밑의 대밭이 흔들렸고 대밭에서 이천년 전의 여자들이 걸어나왔다. 항아리를 들고 대광주리를 들고 이천년 전의 여자들이 걸어나왔다.

 

 우리 마을에는 이천년 전의 도시가 있다. 사람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여자들만 살았던 이천년 전의 나라에는 많은 돌담이 있었다. 밤이었다. 하늘에서 불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천년 전의 마을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이천년 전의 산과 나무, 여자들과 아이들이 불타올랐다. 이천년 전의 닭과 돼지, 오리와 염소들이 불타올랐다. 모두 타버리고 돌들만 남았다. 돌담과 고인돌과 깨진 항아리들만 남았다. 나는 고인돌 밑을 파나갔다. 고인돌 위에는 노란색 별들이 무섭게 날아다녔다.

 

 


 

 

김참 시인 / 그림 속에 갇힌 사람들

 

 

 커튼을 흔들며 들어온 바람이 먼지 쌓인 그림을 스쳐가는 미술실, 나는 의자에 앉아 이젤 위의 그림을 본다 그림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미술실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그림 그리는 여자가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녀의 그림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있다 불꺼진 미술실 의자에 앉아 권태롭게 창 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왼쪽 머리 위에서 어둠 을 밝히는 백열등이 올빼미의 노란 눈처럼 반짝인다 그림 속 어두운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는 그림이다 내가 그림을 보는 사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여자의 그림 밖으로 나와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나는 미술실 구석에서 그림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를 그리고 있는 푸른 눈의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여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왼쪽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깜짝 놀라는 내 모습을 보고 더 깜짝 놀란다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고막을 크게 울린다 의자에 앉아서 뒤통수를 그리고 있던 여자가 푸른 눈의 여자에게 커피 한 잔을 뽑아준다 두 여자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를 닮은 사람이 그림을 빠져나온다 여자들 몰래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나간다 미술실 밖으로 퇴장한다 잠시 후 나를 닮은 남자가 미술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입이 쩍 벌어진 나에게 말한다 이봐! 당신,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김참 시인

1973년 경남 삼천포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인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199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미로 여행』 『그림자들』,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 1999년 현대시 동인상 수상. 김달진문학제 젊은시인상 수상. 지리산문학상. 인제대학교, 동의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