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규 시인 / 별들의 시차
그가 음독(飮毒)하며 중얼거렸다는 말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천문학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정치를 했다는 이력으로 한 죽음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눈이 아프도록 흩뿌려진 별 아래 당신의 몸속 세포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수가 일치할 거라는 상상이 길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어떤 죽음은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이 꼬리를 그리는 건 그 속에 담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
이은규 시인 / 꽃소식입니까
꽃을 즐겨 그리다 쇠약해진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물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인가요
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편지 속 문장 유화라기보다 으깬 꽃잎에 가까운 그림들 그림 그리기란 온몸의 노동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귀가 아플 만큼 고요한 날 귀를 자른 그는 미친 듯이 웃는 것으로 한 계절을 앓았다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문득 도착한 곳 아직 들리지 않는 향기, 꽃은 없다 그늘로만 서성이는 발걸음 너머 누군가 저 다리를 건너가면 절정이 환할 거라는 귀띔
봄과 봄 사이
저만치 바닥을 나뒹구는 꽃숭어리의 절정 그렇게 가는 봄날 세상의 꽃소식인 것 같기도, 아닌 것도 같은
이은규 시인 /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문득 놓치고, 알은 깨진다 깨지는 순간 혈흔의 기억을 풀어놓는 것들이 있다 點點의 붉음 어느 哲學者는 그 혈흔을 날개를 갖지 못한 새의 심장이 아닐까 물었다 이미 흔적인 몇 점의 혈흔에서 심장 소리를 듣다니 모든 가설은 시적일 수밖에 없고 생은 어떻게 그 가설들로 추상을 견디길 요구할까 시적인 哲學者의 귀는 밝고, 밝고
날개를 갖지 못한 알 속의 새는 새일까, 새의 지나간 後生일까
생은 경계도 없이 수많은 가설들로 붐비고 깨져버린 알이나 지난봄처럼 문득 있다가, 문득 없는 것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깨진 알에서 혈흔의 기억을 보거나 혹은 가는 봄날의 등에 얼굴을 묻거나 없는 새에게서 심장 소리 들려올 때 없는 봄에게서 꽃의 목소리 들려올 때 그 시간들을 살기 위해 견딤의 가설을 내놓는다
새가 되어보지 못한 저 알의 미지는 바람일 것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영역도 다스릴 바람도 없다 이음새가 없는 새의 몸, 바람으로 머물던 흔적이 곧 몸이다
너무 멀리 날아가서 다스릴 수 없는 기억처럼 새,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의 배후는 허공이 알맞다 새의 심장에서 들리는 먼 곳의 안부를 깨진 알의 혈흔에서 듣는다
이은규 시인 / 점등(點燈)
책장을 넘기는데 팟, 하고 전구가 나갔어요 밝기의 단위를 1룩스라고 할 때 어둠의 질문,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탐미적인 어느 소설가는 소셜리즘이 수많은 밤을 소모시킨다고 불평했어요 그토록 와일드한 오스카 이야기, 안타깝지만 그는 빈궁을 벗 삼아 죽어갔어요 뜻밖에도 오늘의 밑줄은 성서의 한 구절,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때로 이상한 열기에 전구 내벽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할 거예요 어둠의 공기를 마신 시인의 폐벽처럼, 그럴 때 필라멘트는 일종의 저항선으로 떨려요 가는 필라멘트 같은 희망으로 아침을 켤 수 있을지 귀 기울여요 고백하자면 세상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오늘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이은규 시인 /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이은규 시인 / 차갑게 타오르는
몇 점 눈송이가 겨울을 데리고 왔다 편백의 숲으로
여독에 물든 것들은 왜 추운 바람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걸까, 관성처럼 기다리는 안부는 멀고 희망이 가장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보기로 한다
두고 온, 나를 잊을 수 없다 편백나무의 기억을 기억하는 어느 화가처럼
어둠일수록 별을 아끼는 이유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된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된다 해석에의 동경보다 오독을 즐겨 할 것 언제일까 스스로 귀를 자를, 문장의 시간
두통의 잉여를 달래는 요법 이마에 물먹은 편백나무 한 조각 올려놓는다 피톤치드 피톤치드 소리 없이 속삭이는 별들 두고 간, 화집 속에 차갑게 타오르는 편백나무
여독의 몸이 보내온 추운 바람 냄새가 닿을 것 같은 밤, 관성처럼 기다리지 않은 안부는 가깝고 희망이 가장 나중에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보기로 한다
죽음보다 더 나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요법의 겨울 도처에서
이은규 시인 / 오는 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중력이었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최후.이미여하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가도 가도 계속 봄이 돌아왔다
*이상의 시 <최후>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대식 시인 / 고래와 시인 외 7편 (0) | 2025.11.14 |
|---|---|
| 이위발 시인 / 하늘가는 길 외 6편 (0) | 2025.11.14 |
| 김참 시인 / 지난여름 외 10편 (0) | 2025.11.14 |
| 김고니 시인 / 가을을 삼키다 외 6편 (0) | 2025.11.14 |
| 김은정 시인 / 일인분이 일인분에게 외 7편 (0) | 2025.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