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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성훈 시인 / 키 링, key ring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5.
권성훈 시인 / 키 링, key ring

권성훈 시인 / 키 링, key ring

불안을 끌고 자주 시동이 꺼졌던 속도를 삼킨 적 있지

찾지 못할 때까지 잃어버리기도 하는

결말을 알고 나서

조금씩 키가 자라듯 간절해진 소원처럼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생겨난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으로 당신을 비키면서 들어간 당신으로부터

뭐랄까 우린 처음 칸에서 마지막으로 고요해진

구멍 난 열쇠같이 한 입 베어 문

뾰족하고 날카로운 지난날도 둥글어진 바탕이 되는 순간을 말해

 

이제야 헐렁해진 상처는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아

더는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어

 

바깥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안으로 모아지고

잔존을 모르는 그 밖은 더없이 소란한 데

이곳에서 겉도는 것은 헛돌아도 의미가 되고

고리의 바깥은 고쳐 멜 수 있지만

고쳐도 멜 수 없는 흔들리는 완전한 뿔.

 

 


 

 

권성훈 시인 / 꽃밭 포구

 

 

꽃이 없는 꽃 축제같이 삶이 없어 삶을 기리는

 

불거진 장례식

 

하얀 꽃에 둘러싸여 생생한 부재를 알리며

 

세상 밖에서 웃고 있다

 

바다가 묶여 있을 때

 

쉬어버린 뱃고동 소리를 눅진한 밤에서 꺼낸다

 

실망한 적 없는 오래된 점자처럼

 

뿌리 없는 구멍이 남독 되어버린

 

더는 필요 없는 발음인 거지

 

무르익지 못한 이번 생애를 발라놓은 비밀 화원

 

도처에 물기 없는 물기로 화단에 떠오르고

 

사라진 나비들의 입맞춤

 

시들기 전 그 시절로 찾아온다

 

돌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는 듯

 

수위 조절 없이 환승하며 기약 없 이 도달하는 포구

 

방향도 없이 가고 없는 꽃밭이 한창이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권성훈 시인 / 몽돌 소녀

 

 

강원도 하늘 내린 인재군 기린면 구름동

산 아래 긴 목을 가진 소녀가 살지

 

집 나갔던 엄마 방향으로 목덜미를 세워 바라보다 잠이 들었던

 

몽글이라는 까만 말을 만지작거리는 구름 담장 넘어올수록

튼튼하게 젖은 뼈대가 자라나고

점이었다가 점점 모호하게 달아나며

물방울같이 터지고 싶었던 사연들로

 

방치된 예보를 숨긴 날씨 고개 드는 편집된 회색 감정

어제는 동쪽에서 서쪽을 지나가고

오늘은 남쪽에서 북쪽을 거닐다가

하늘에 차려진 구원이라고 믿어버린 신점같이

 

기억 바깥에 있는 것이 더 선명하게 흘러가는 것이니

 

언제나 화면을 여는 것은 둥근 쪽

돌아오지 않을 불완전한 우울로 얽히어 구르기 좋은

한 뼘 더 멀어진 기다림조차 닿지 않아도

뿌리 없는 뭉개 잎사귀가 아이처럼 늘어만 가지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권성훈 시인 / 별 사마귀

 

아직 오른쪽 하늘이 모르게 떠 있는

왼쪽 발바닥에 돋아난 사마귀 무게를 받아내느라

빛나지 않은 통증은 걸어갈수록 반짝거렸다

 

​멀어지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어울려 있지 않아서 어울리는 상사화같이

꽃은 잎을 못 보고 잎은 꽃을 못 보는 사랑

 

​그런 바닥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앞질러 새로운 표정을 짓고는 했다

 

​붙어있지만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들

반대편 거리와 같이 멈춘 만큼 멀어져만 가는

가는 길을 다 아는 듯 흐린 날씨를 매달고

 

​보이지 않는 감정을 끌고 다니며

커졌다 작아졌다 깜박이며 증식하는 고백의 거처라서

이탈한 오랜 행성처럼 겉돌지만 벗어날 수 없다

 

-계간 『시결』 2024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 성씨들의 모국어

 

 

참이슬을 마시다가 참이 이슬의 성씨라는 것을 알았다

참은 사실이나 진리에 어긋남이 없이 옳고 바른 것

김씨도 이씨도 박씨도 참이슬 앞에서는

참으로 고개 숙여 가는

한잔의 사람 한병의 사람

탐욕을 이어온 성씨를 버리고 나서

원래 성씨가 없던 족보의 빈칸으로 간다

모두가 여백 위에 뒤섞인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동그랗게 맺힌 이슬 같은 사연만이 빈 병의 증언이 된다

오래 참아온 울음을 웃음으로

고이 간직한 부끄러움을 자랑스러움으로

참사람을 힘주어 주문한다

불안도 치욕도 건배로 꺾고 또 꺾는

거기서 누구나 흔들리며 다시 태어난다

진리값이 높아 갈수록, 참나

명제로 통하는 두 병 세 병 진열되는 어둠을

이미 짙어진 참으로 밝히면서 돌아가라

지금은 습득된 언어를 잊어가며 모국어를 찾아가는

모두가 서약서 없는 맹세로만 충만할 때

 

계간 『실천문학』 2023년 여름호 발표

 

 


 

 

권성훈 시인 / 소래 게

다시 바다를 열기 위해 그늘진 하늘을 닫는다

소래하면 포구라고 듣고 싶었던 어긋남으로 완성되는

집 없이 집게발 달린 당신을 불러 보는 저녁

손금이 생기기 전 운명보다 더

먼저 손을 잡은 그곳에서

지난 금기는 한번 떠난 바람같이 오지 않는 것

펼쳐진 수평선 알아차릴 만큼 갯벌을 감쳤다가

어김없이 써 내려간 물길 속을 드러낼 때

지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오래 머물던 노을

정박한 감정을 내린 닻 돛을 올리며

소라게처럼 빠르게 숨죽이며 흔들렸다

여러 제목을 가진 노랫말 무성한 소리를

비명처럼 부르면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많은 이름을 가졌기에 이름이 없었던

당신만이 나를 들을 수 있게

그렇게 다른 한쪽을 찾을 수 있게

기대고 있지만 닿을 줄 모르는 소래포구 소라게

누구의 집도 아니지만 모든 날 집이 되는

아무 제목이나 갖다 붙어도 거기서 숨 쉬는 당신

방금 멈춘 말을 멈춘 입가 불완전하게 번지면서

단단하게 구부러진 흥얼거림으로 도망가지 않는

갯벌 자욱한 소래 게가 살았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24년 여름호 발표

 

 


 

 

권성훈 시인 / 오렌지 등대

 

 

한 번도 피지 않은 꽃은 있어도

한 번만 핀 꽃은 없는

그런 위로를 들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아팠던 것 같고

 

우린 기력을 다해서 피어 올린 등대

여러 날 꽃대를 매달고 밤바다 꽃을 피운다

 

매일 만나지만 우린 만난 적 없는 거야

약속으로 젖은 노을의 머리카락을 쓸어 담다가 알았다

빛나지 않는 밤은 바뀌어도 밤

 

파도 같은 숨소리 언제나 같은 무늬로 범람하는 물결일 듯

도처에서 배웅하는 바람으로 하염없이 떠돌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벽처럼 쏟아지는

저녁의 한 획을 긋는 유성을 처음 보았던 날

 

우린 모든 별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적막을 바라보는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붉은 등대의 뒤편 서로의 가슴을 안고 등을 지키는

감전된 불길처럼 한꺼번에 번지고

난간에 무릎 꿇은 채 하혈하는 동안

마지막까지 녹아있는 입에서 레몬 향이 났다고 했다

 

온몸에 등이 달린 오렌지 나무 조명

창문을 열면 무수한 하나만 우리의 것이라는 듯 열리고 열렸다

 

-계간 『가히』 2024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 칼로리 높은 고백

 

 

붉게 저무는 바삭한 저녁을 베어문다

그런 밤은 동쪽에서 와서 서쪽으로 가고

바코드로 이동하는 바꿀 수 없는 주기라서

 

때론 버터를 바른 은유같이 내장을 적시며 오고는 하지

 

먹기 좋게 잘라 놓은 방향에서 우리

별일 없이 겉돌고 있는 행성처럼 겉돌아서

사라질 수 없는 약속들 반죽이 덜 된 속도로 곱씹고는 해

 

결말 없는 소문처럼 우리 말은 진화하는 거라

달콤한 복리로 부풀기만 했던 얼음장도

오븐에서 바로 꺼낸 생기같이 칼로리 높은 고백이 되네

 

아직 소화되지 않은 철없는 시절 반대편으로

서로 기다렸던 첫눈

기나긴 폭설로 변했지만 지나온 발자국을 덮어주었지

 

모든 입안에 수사들이 일몰처럼 명랑하게 번질 때

구워지는 이름이 섬처럼 떠오른 거야

 

-계간 『다층』 2024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2002년 《문학과 의식》 시부문, 2013년 《작가세계》 평론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유씨 목공소』,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편저 『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 등. 젊은 작가상, 열린시학상, 한국예술작가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