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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녕 시인 / 지는 것은 노을의 일
허기진 저녁이면 솥단지 선짓국이 먼저 끓는다 밥물 끓듯 강물 뒤척이고
귀 어두운 여섯 식구 대신 들개 우는 소리
서녘 하늘로 퍼져 가는 요령소리
슬픈 것들은 모르고 연대한다
김안녕 시인 / 마음 키 작은 내가 가끔은 키 큰 수숫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한 것처럼 어느 날엔 애 둘 낳고 서른에 집 떠난 큰삼촌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우리 몰래 무언가를 숨겨 놓던 다락에도 장롱처럼 깊고 캄캄한 곳에도 그것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었다
조약돌만 할까 그것은? 솜사탕처럼 바스라지기 쉬운 걸까? 불같다는 소문이 돌았고 누구는 귀신같다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기실은 물뱀의 무늬처럼 여린 배신자의 마음 추분이 오기 전 벼락같이 떨어져 내리는 능소화의 마음 기어이 물을 건너가는 사공의 마음
사탕 봉지를 열면 달콤한 사탕 냄새 곧 죽어도 괜찮을 것 같던 사랑스런 냄새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시집 『사랑의 근력』 (걷는 사람, 2021)
김안녕 시인 / 수국이 피면 바다에 같이 가요
겨울에 했으면 하는 일, 겨울 길은 살살 걷기 연한 빛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기 흩어진 털실을 모아 두기 흩어진 빛을 찾아 뜨개질하기 노랑 귤을 소쿠리째 사서 겨우내 입안에서 시큼하게 굴려 보기
일호선을 타고 가다 문득 내려 망월사에 드는 것 기별 없이 마음을 주는 것 가서 아득한 풍경소리만 듣다 오는 것 들어도 듣지 않는 것처럼 그저 있는 것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고 한번은, 잡아 보기도 하는 것
고기를 줄이고 말을 줄이고 휘파람과 풀때기 눈물은 늘리기
세상에 없는 노래를 지어 부르다 낮술에 취하기 몽롱한 목소리로 돌멩이에게 전화하기
수국이 피면 바다에 같이 가자 말한 사람을 유월이면 수미감자 한 상자씩 보내는 사람을 구순 노모의 휠체어를 종일 밀며 가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그리워하지 않는 일
종내 내가 그리움이 되는 일
김안녕 시인 / 망원
망원, 망원은 희망보단 원망하는 마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같다 퇴근할 때 그런 마음은 더해지고
시를 써야 할 텐데 못 쓴 날들이 얼마나 되었지, 어쩔 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 끼니로 순대 일 인분을 산다 ―내장 넣어 드려요? ―간만 빼고 주세요 ―간만 달라는 분도 있고 간만 빼고 달라는 분도 있고 다 달라요
마스크 밖으로 웃음이 삐져나오고 푸드트럭 사장님은 길바닥에 사는 현자구나 희멀건 허공 간질이듯 내장 냄새 피어오른다
―멀리 가요? ―예, 멀리 갑니다
순대는 비닐에 한 번 담기고 신문지에 돌돌 말려 사각 보따리가 된다
―이렇게 싸면 식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나요
나는 정말 멀리 가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태릉행 전철을 탄다 식지 않는 순대가 식지 않을 심장처럼 동행한다
기꺼이 꺼이꺼이
-시집 <사랑의 근력> 걷는 사람, 2021
김안녕 시인 / 어느 맑은 날
나 닮은 여인을 제주에서 보았다고 그는 전화를 했다 나처럼 어여쁜 여인이 또 있더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상계동에서 옛날 맛이 나는 고추장수제비를 현아 언니와 둘이 먹는다
혀를 데면서도 끝없이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여름은 사랑할 수밖에
비도 안 오는데 괜히 옛날 생각 새빨간 수제비 맵다고 울고 싶은 수제비
그래도 우리는 수제비를 포기할 수 없고 팔월에도 내년 여름에도 십 년 뒤에도 또 올 테지?
얼룩덜룩한 얼굴로 누군가 흘러내린 벽지처럼 웃는다 울다가 웃는 사람의 얼굴은 모두 닮아 있고
비린 풀밭들 은행사거리와 당고개와 덕능고개 넘어가다 보면 별내가 나오고 집이 나온다
33번 대신 80번을 탔으면 좋았을걸 머리를 좀 더 굴렸으면 좋았을걸 시는, 안 썼으면 좋았을걸
모든 게 수제비 탓이다
-시집 <사랑의 근력> 걷는 사람, 2021
김안녕 시인 / 시의 맛
장독대 속 묵은 김치를 죽죽 찢어 빨아 본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여름이 섰는 포도원의 알을 깨물어 본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 그 안에 갇혀 있는 달 한 조각을 새벽 다섯 시 아직 깨지 않은 하늘을 아윈 그림자 비친 우물물 한 모금을 돌이켜 본다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겠어, 그걸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 시인들이 우주 밥상에 그득하다
-《사랑의 근력》(걷는사람, 2021)
김안녕 시인 / 호수공원 새로운 울음 무구히 태어나 은빛 성성하다 겨울 지난 호수에서 맹꽁이가 울다 조팝나무가 새와 나란히 울다 한 사람 올라탄 그네가 울고 있다 흐느끼는 것들이 좌판을 펼친 봄 잔디를 밟으면 밟히는 소리도 없는데 간혹 여기 없는 것들이 우는 소리 들린다 잘못 들은 걸까 무주 구천동 넘어갈 때 들리던 고라니 소리 물살을 헤집다 달아난다 여느 해보다 일찍 핀 벚꽃 잎의 표정은 놀라움일까 두려움일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까 실패는 그저 실패의 어머니인 걸까 솜사탕처럼 부풀어 허공에 흩어지고 싶다 계속 실패하고 싶다 호수와 함께 맹꽁이와 함께 2023년 4월 3일 오늘의 포춘 쿠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가끔은 아프다는 사실을 잊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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