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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 / 하늘 우체국
하늘 우체국에 가본 적 있다 구름이 치는 전보 속에서는 깨알빛 새들이 시옷자 날개를 펴고 텅 빈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우체국을 품고 있는 산맥의 품에서 연필심이 수런수런 피어올랐다 만년설 아래에도 흑연이 숨어 있을까 투명한 결정들이 지면을 이룬 거대한 엽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 깜빡이듯 낮과 밤이 바뀌는 동안 사람과 산양들이 서툰 글씨로 저마다의 사연을 기록해둔 곳 잉크 자국조차 가물가물한 설원엔 펜혹을 닮은 바위들만 솟아 있었다 나는 손바닥만한 알프스를 사서는 그 뒷면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마을까지 퍼지지 못하고 바람에 증발되는 목동의 노래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일까 눈 삼키다 멈춰 선 제설차의 기침을 옮겨 적을 수 없었다, 그때 해발 3,500미터의 쓸쓸한 우체국*에서 네가 있는 서울 반지하 주택까지의 거리가 크레바스보다 더 움푹 팬 흉터로 아려왔다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엽서 위에 긴 문장을 적듯 천천히 우표를 붙였다 유리창에는 서리가 적어 놓은 주소가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우체국이 있다.
이병철 시인 / 나막신
銀河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고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이병철 시인 / 숨바꼭질2
골목이 너를 어떻게 숨겨주었을까 웃음소리와 그림자가 흩뿌려져 있고 나는 그림자만 구별해서 주울 뿐 볼 수 없는 너를 찾는 숨바꼭질
숨어서 보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골목을 벗어날 수 없는 술래
해 질 무렵 멸치 볶는 냄새 개 짖는 소리, 나뭇잎의 떨림이 골목으로 숨여들면, 무서운 세상이다 숨는다는 건 사라지지 못한다는 것
그토록 찾던 단 하나의 마음이 수천만 개로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찾던 것은 머리카락 한 올인데 지금 눈앞엔 해초보다 무성한 네 머리칼이 빛도 통과시키지 않은 채 너를 숨겨주고 있다
암전 속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 집 없는 아이들이 어둠을 더듬는다
꼭꼭 숨어라 어디선가 소리와 냄새가 되고 있을 너
이병철 시인 / 블루홀
푸른 태양이 눈을 헤엄친다 발끝에서 한 올씩 풀려나가는 음악, 우리는 허우적거리며 겨우 숨 쉬는 입술을 가졌지
은빛 정어리 떼와 함께 몰려왔다가 유리처럼 부서지는 너라는 파립, 흩어지는 네 몸 모든 조각들이 눈부셔서 나는 피 흘리고 피 냄새가 저 깊고 검은 물을 깨우기 전 두 다리를 퇴화시켜 지느러미를 얻었다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데 우리는 헤엄친다 물에 잠겨 부레가 되어가는 심장에 산소를 채우느라 빵과 키스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삶을 부르는 호흡법, 다른 세상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그해 여름도 물속에서 보냈지 수압을 견디느라 귀 막고 눈 감은 채, 산소통을 메고 내려오는 전도자들을 피해 바다 속을 영원한 낮잠으로 바꾸려고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물과 너는 나의 전부다
물은 세상 밖으로 흘러가는 걸까? 바다의 끝이 어딘지 너는 알고 있고 나는 그저 너를 쫓아가는 게 좋아....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물속에서 종아리에 내 목숨을 매달고 헤엄치던 너는 정말 예뻤는데
너를 따라 물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너는 거기 없고, 너를 찾던 나는 끝없이 푸른 꿈의 코르크마개를 그만 열고 말았지 유령처럼 낯선 울음이 들려오던 그 구멍이 실은 세상을 빨아 삼키는 단 하나의 입이었을 줄이야
휘파람 소리로 소용돌이치며 소멸하는 세계, 우리가 드나들던 녹색 철문과 시집이 꽂혀 있던 우편함과 빨랫줄에 매달린 수건과 오후 여섯 시의 라디오 소리가 비명 같은 음악으로 빨려 들어가고
물살에 감겨 물살이 되어 얼음의 시간을 향해 떠내려가는 우리 아니, 소용돌이 속에는 나 혼자 있고 이 세상과 내가 함께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네 푸른 눈이 저기에
이병철 시인 / 비 개인 저녁의 안부편지
네가 사는 마을에는 은빛 비가 내릴 것 같아 수련 위에서 빗방울은 찬 빛을 뿜겠지 햇살이 젖은 꽃잎을 말릴 때 물방울은 붕붕거리는 데이지 향이 되어 네 반지에 내려앉을 거야
물소리가 일어나는 네 자궁 속에는 손끝에 별빛을 틔운 아기가 웅크리고 있겠지 백합과 히아신스 그리고 티아라 그 꽃말들을 아직 기억하는지 네 입술이 뱉는 자음 모서리에 나비가 날아들고 들뜬 아기는 자꾸만 발을 구를 거야
가로등불이 이끄는 수레에 저녁이 담기고 감자수프 냄새로 내려앉는 밤하늘, 너는 서툰 이국말로 상인들과 흥정하며 별을 담듯, 쾌활하게 장바구니를 채우겠지
네 입술이 엎지른 적포도주가 되어 바게트 빵 같은 어깨로 스며들 때 저 먼 대륙에서는 소년병들이 쓰러지고 벵골호랑이는 질긴 살가죽을 찢으며 피비린내를 음미할 거야 잠깐이라도 소년병들과 벵골호랑이를 생각해줘 그러면 내 더벅머리도 떠오를 테니
내가 비 개인 붉은 저녁을 바라볼 때, 너는 오전의 싱그러움 속에서 빨래를 널고 있겠지 저 노을은 네 침실의 할로겐 불빛일 것만 같아 긴 손톱으로 할퀴어놓은 흉터가 따끔거려 까마귀가 날아와 내 살을 쪼아 먹기까지 달빛에 몸을 말리며 여기 서있고 싶어 젖은 몸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이병철 시인 / 수련회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는 모습으로 나무들이 쌓여 갔다 기름 냄새가 떠도는 강가에서 우리들은 손을 이어잡았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누군가는 형광 조끼를 입고 호루라기 소리를 내면서 불이 타올랐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시 거꾸로 돌면서 축복해, 말하고 나무들이 무너지는데 불은 자꾸 커지기만 했다
우리들이 만든 원에는 출구가 없었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부 회장이 입구에 서서 원을 벗어나려는 동작들을 제지했다 회원들의 그림자가 멀리 강물에 닿았다
불은 얼굴들을 비추고 꺼뜨리고 두려워하는 표정을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두려워하게 됐을 때 우리들은 죄를 말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불 속에서 그가 고통받기 때문에
미워했다고 말하자 나무가 무너졌다 저주했다고 말하자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불 앞에선 더 솔직해야 한다고 꽉 잡은 손이 더워 놓고 싶었지만 우리들은 서로에게 기대면서 무너졌다
가장 어두운 죄만큼은 불에 비치지 않게 고개를 숙여 그늘을 만들면서 마음을 속여 기도를 만들면서 눈물을 흘릴수록 불이 커졌다
회장의 죄가 무엇인지 잘 듣지 못했다 내내 울고 내내 소리치는 그의 안경에는 불이 두 덩어리나 타고 있었다 죄보다 긴 그림자는 없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은 밤새 환했다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뺨이 뜨거운 이유를 알아야 했다 형제 안에서 영광을 보네 자매 안에서 존귀를 보네 우리들이 원 안에서 불에 타고 있었다 서로의 안에서 무너지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병철 시인 / 난 보았네, 7월에 너를
한적한 들길 길섶 무리지어 웃고 있는 너, 코스모스야
어쩌자고 태양이 작열하는 이 무더위에 피었더냐
더위 속에서도 무리지어 키들대는 너희 모습 한 점 티끌 없는 소녀의 순정 그대로 분홍빛 얼굴 참 이쁘기도 하다 마는
드문드문 후끈한 바람 속에서도 어깨 맞대어 소곤거리는 너희 모습 새실 많은 소녀 모습 그대로 참, 청순하기도 하다 마는
새실이 바빠 계절을 잊었더냐 가을바람에 피어야 더 사랑스러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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