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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 시인 / 이런 질문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6.
이경 시인 / 이런 질문에

이경 시인 / 이런 질문에

 

 

아버지가 뭐하시느냐고

묻던 사람들이

남편이 뭐하느냐고 묻는다

 

눈을 뻔히 뜨고 있는 나를

뻔히 뜬 눈으로 못 보는지

그렇게 묻지 않곤 못 배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

아버지 직업을 묻던 사람들이

남편과 어떤지 묻지 않고

남편 월급만을 묻는다

 

시인 동네 사람들도 그게 그런지

어떤 시를 쓰느냐 대신

어디로 나왔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에 익숙지 못한 나는

어머니 자궁으로 나왔다고

대답할 뻔! 했다

 

-《열가지 소리의 시》 인북스. 2018

 

 


 

 

이경 시인 / 구경꾼

-사막1

 

 

낙타를 빌려 타고 사막을 구경 했다

 

하이데거를 빌려 타고 서양철학을 구경하듯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명사산을 돌아 나왔다

 

갑론을박 꼬리에 머리를 부딪는 낙타 행렬을 뒤따르는데

 

사막이 말씀의 빗자루로 낙타 발자국들을 쓸어내고 있다

 

학문은 진리를 탐구한다지만 진리는

 

지식의 쓰레기더미에 깔려 압사할 지경이다

 

사막은 깨끗이 쓸어 놓은 화선지를 발밑에 깔아주며

 

맨 처음의 발자국을 찍어보라 하신다

 

 


 

 

이경 시인 / 돈황의 미소

-사막2

 

 

문둥이 부처가 앉아 있더라

열손가락 열 마디가 다 문드러지고

코도 입도 눈썹도 희미해져 눈알이 뽑혀 나가

문둥이가 된 부처가

아직도 미소 짓고 있더라

미소의 힘으로

사막의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더라

 

먹고 갈 사람 먹고 가고

놓고 갈 사람 놓고 가고

가져 갈 사람 가져가시라

두 손바닥 들어 올려 펼쳐 보이시더라

 

한 때 낙타를 타고 온 거상들이

금으로 옷을 입히고 눈에는 보물을 심고 가더니

세계의 도둑들이 와서 다 뜯어갔다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돈황의 미소만은

아무도 가져가지 못 하였더라

 

 


 

 

이경 시인 / 번식기

 

매미가 우네 몸이 고파 우네 고픈 몸이 슬퍼 울고 또 우네

​등을 뚫고 몸을 빠져나간 매미가 몸에 갇혀 우네

​달아나도 달아나도 몸이네 오래된 감옥

​보리수 아래 벗어놓고 간 몸이 비에 젖네

​기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뭔가 해낸 몸

​보리수 잎이 빈 몸을 상여처럼 받쳐 올리며 비를 맞네

​발톱들이 잎을 잡고 놓지 않네

​더 지킬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몸을 빠져나가기 위해 제 등을 찢을 때

​잎맥 속으로 파고들어 부르르 떨었을 발톱

​몸을 밀어낸 몸이 몸 밖으로 밀려난 몸이

​보리수 아래 엎드려 있네 등을 활짝 열고 꼼짝하지 않네

​여름이 긴 기적을 울리며 여름을 빠져나가네

-시집 『야생』 (현대시학, 2022) 수록

 

 


 

 

​이경 시인 /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오랜 침묵을 깨고 나리꽃 피었다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름의 바깥에 적나라하다

공들여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잎으로 꽃봉오리를 받들면서

천천히 꽃 머리를 수그리면서

사라질 것이 분명한 색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꽃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타오르는 중이다

차가운 불

손가락으로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중이다

나리꽃! 부르기 전에 이미 대답하는 너

벙어리처럼 따라 웃는다

세상에는 한마디도 너에게 맞는 말이 없어

벗은 꽃에게 옷 입힐 수 없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이경 시인 / 정사

 

 

암 사마귀는 강하다 교미하는 순간

제 사랑을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잔해를 남기지 않으려고

집착의 대상을 살려두지 않으려고

무엇보다

사랑이 빠져나간 그의 등을 용납할 수 없어

 

절정의 수컷을 정수리부터 먹어치운다

풀숲의 역사만큼이나 질기고 능숙한 혀 속으로

이 목 구 비가 녹아들어

황홀하게 심장을 뜯어먹히는 숫 사마귀

 

오 저처럼 싱싱한 사랑을 생식하는 암컷의 식욕과

심장보다 더 늦게까지 살아남아 생을 무두질하는

숫 사마귀의 저것!

을 보라

 

독이 익어가는 가을 꽃밭이다

탄피처럼 몸이 부푼 암 사마귀 한 마리

마른 꽃대궁에

청산가리같은 목숨을 하얗게 쏟아놓고

 

 


 

 

이경 시인 / 하늘을 파는 사람들

 

 

그렇게 큰 울음소리를 들은 적 없다

석탄을 양껏 실은 힘센 쇳덩이가

시루떡같이 뜨거운 숨을 푹푹 토하며

목통을 따는 울음소리로 달려갈 때면

쥐구멍 같은 집들 허파가 들썩거렸다

식구들 콩나물 잠 꿈이 헝클어졌다

헝클어진 자리 꽃이 피었다

꽃들이 겁 없이 지붕을 뚫고나와 손을 흔들어 댔다

철길이 마당인 소꿉장난 속을 지나가려고

비명을 꽤액 꽥 지르는 불덩이를 본 적 있다

뜨끈뜨끈한 레일 위에 뺨을 갖다 대면

먼 바다로 꿈을 팔러 가는 고동소리가 들렸다

산다는 것은 무엇을 파는 일이었다

빈 몸으로 흘러든 사람들이 먼저 고향을 팔았다

진주식당 언양쌀집 양산보일러 남원추어탕 대구지물포

함양탕제원 서울깍두기 미자 헤어샵 미륵보살마하살

팔 고향이 없는 소녀들은 몸을 팔았다

그것도 없는 늙은 여자가 미륵을 팔았다

팔다 남은 소금자루 같은 몸을 이끌고

일당 몸값을 털어 천국을 사는 사내들처럼

희망 없는 여인이 파는 희망을 나는 사야 했다

천복(天福), 천고(天孤), 이것이 전 재산

하늘이 내린 복, 하늘이 내린 고독이라고

그 때 큰 소리로 쇠가 울었다

 

-惟心 2007 "겨울호" [재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이경 시인

1954년 경남 산청 출생. (본명 이경희). 1993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시집 『소와 뻐국새소리와 엄지발가락』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야생』 등. 현재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제5회 유심작품상 수상. 제19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