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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 시인(무안) / 구럼비를 제물로
십만년의 자연도 수백년의 마을도 애국심의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오늘 구럼비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바다로 침몰했다 야만의 정책이 죽음의 그림자를 부르고 강정마을을 초상집을 만들고 있다 내 땅도 지키지 못하면서 내 국민도 지키지 못하면서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저 오만한 생각이 사람들 마음에 불신을 심었다 자연을 제물삼아 사람을 제물삼아 평화를 지키겠다는 저 무서운 생각이 강정마을에 상복을 입혔다 제 국민의 마음 하나 읽지 못한 정책으로 바다를 지키겠다는 저 아둔한 생각이 구럼비를 죽음의 그림자로 몰았다 구럼비를 제단에 바쳐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 자연을 죽여야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거짓 평화요,거짓 생명이요,거짓 애국심이다
-한겨레 신문 2012년3월9일 금요일
김희정 시인(무안) / 기적 예수님은 생명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나는 책값 수 백만 원을 몇만 원으로 만들었다 경제학 교수가 보았다면 낙제점이다 큰 돈 들여 산 책들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결과가 이렇다 고물상 주인 소싯적 공부 좀 했을 것 같다며 위로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결국 안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똥값이네 똥값을 반복한다 똥값이 아니고 종이값이라고 응수했더니 책 몇 권 값이라고 외통수를 친다 그 한 마디에 수 많은 작가들 순식간에 죽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김희정 시인(무안) / 전생에 아내는 낙타가 아니었을까
아내의 두툼한 허리에 매달려 사막을 건너는 나 층층이 쌓여 혹처럼 굳어 가는 아내의 생 막막한 어둠을 뚫기 위해 나는 낙타를 키우고 있었던 것일까 며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묵묵히 모래 바람을 견디는 낙타처럼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려딛는 그녀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모래알은 무너진 아내의 꿈처럼 푸석거린다 세상 열기가 그녀 머리에 닿아도 빽빽한 속눈썹은 숲을 만든다 그 곳에 숨겨진 눈망울에 그늘이 진다 무거운 짐을 인 낙타처럼 사막 위에서 길을 찾다, 한낮 물빛을 그리워했고 밤 추위가 온 몸을 휘감으면 따뜻한 사랑에 목말라한 그녀 봉우리처럼 솟아난 혹은, 모래바람에 깎여 무거운 침묵으로 서걱거린다
김희정 시인(무안) / 다림질 아내가 옷을 다림질 하면서 주름이 잘 펴졌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그 옷을 입고 세상 이곳저곳 기웃거리다보면 수많은 갈랫길이 만들어진다 옷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보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다는 듯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직항로처럼 표시해 준다 세상에 나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 만들면 좋겠지만 가끔 만들지 말아야 할 길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오면 옷에 길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그때마다 아내는 흔적을 지우려고 다림질에 정성을 다 한다
김희정 시인(무안) / 골령골·첫 번째
꿈에서 엄마를 보았다 행복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룰 줄 알았는데
햇살이 눈도 뜨기 전 밖은 시끄럽다 간밤에 엄마를 보아서인지 기분이 좋다 부스스한 얼굴로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계절은 여름으로 달려가는데 찬 기운이 몸을 휘감고 돈다 엄마가 웃고 있었는데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는데 곧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듣지 못했다
엄마 웃는 모습만 생생하다
김희정 시인(무안) / 엄마생각 7
엄마 사망 신고를 했다 아버지가 죽자 나는 일곱 살에 가장이 되었다 오십 년 가까이 엄마 품에 살면서 깊이를 몰랐다 이제, 따가운 햇살도 세찬 바람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고아孤兒다
김희정 시인(무안) / 골령골·마흔아홉 번째
이승에서 사십구일이 되면 떠나야 한다 사십구일이 열 번 지나고 그 사십구일이 또 열 번 지나 열 번이 지난 사십구일이 절반을 넘었다 어떤 아픔 안아도 불귀의 객이 되지 않으려면 발길 잡아야 했는데, 갈 수가 없다
새끼들이 운다 그날 아침 꿈에서 본 엄마가 운다 알아볼 수 없게 나이를 먹은 아내가 운다 나도 저 밑에서 울고 울었다 처음에는 원통해서 울었고 나중에는 보고 싶은 얼굴들 잊혀져서 울었다 울고 울다 긴 세월 이곳에 머물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느껴진다 엄마, 아버지한테 먼저 와 미안하다는 말 못했다 만나면 꼭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직 나는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엄마, 아버지 만나 “사랑한다! 그리고 죄송하다!” 말하고 싶다
이제, 국가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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