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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배 시인 /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 끝에 그리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느린 곡조의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나는 기다린다. 오지 않을 사람 결코 와서는 안 될 사람인 줄도 안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은 보석 같은 그리움을 만들고 싶기 때문. 만날 수 없다면 동동거리는 사람 냄새 나는 그리움을 이젠 사랑해야지. 만나서 재가 되는 황홀함보다 속으로 파랗게 싹이 돋는 겨울나무 같은 그리움을 간직해야지. 세상과의 결별을 준비하는 단풍잎 홍기종기 모여 계절을 모의하는 환절기의 바람 젖은 발부리를 말리는 가로등 뜨거운 입술을 기다리는 앙증맞은 찻잔 슬픔을 압축해 뽑아낸 에스프레소 모두 달콤 쌉싸래하다
구연배 시인 / 새벽길
누가 바람 속에 바람으로 불어와 순결한 풀빛이 되고 꽃 속에 꽃으로 다가와 투명한 향기가 되는지 눈뜨는 아침보다 먼저 깨어나 숲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어보면 안다.
누가 씨앗 속에 씨앗으로 떨어져 뜨거운 뿌리가 되고 흙 속에 흙으로 부서져 고요한 땅울림이 되는지 새벽 강물보다 먼저 일어나 나를 흘러간 우물을 들여다보면 안다.
아, 침묵보다 더 고요한 말씀으로 묵은 귀를 씻는 내 비밀한 당신.
구연배 시인 / 물이 되고 싶다
강둑에 서서 흐르는 물을 본다. 낮게낮게 아래로만 떠내려가는 저렇듯 끝이 없는 겸손
물은 모양도 빛깔도 갖지 않은 채 잠 속에 나를 적실지라도 나는 물을 보지 못한다. 다만 물그림자에 비친 모습으로 그 마음을 읽을 뿐 빈산에 떠오르는 달처럼 물 위를 흐르지 못한다.
가장 낮은 걸음으로 까마득한 들녘을 적시고 작은 가슴으로 우주를 품에 안은 물은 비어 있으면서 차 있고 차 있으면서 비어 있는 허공이다.
길 너머 길을 보는 물 내가 되어 나를 흘러가는 그런 물이 되고 싶다.
구연배 시인 / 점등
아침 햇살이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점등한다.
일제히 켜지는 알전구
하늘은 떠다니는 이슬에게도 점등으로 길을 안내하는데 나는 무엇을 들고 살아갈까
삶이란 눈[目] 덮은 마지막 날을 위해 등불을 준비하는 것이니
마음이 꽃짐 짊어지고 임 마중 가는 길
나는 나를 점등한다.
구연배 시인 / 골목 풍경
술 취한 긴 그림자 끌며 후적후적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가난도 힘이 되는 곳
벌떡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별빛이 묻어 있는 새벽어둠 싸리비로 쓱쓱 쓸어 모으면 삶의 뒷얘기들이 반짝반짝 되살아나는 곳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처마 밑 허름한 담 사이로 옆집 온씨 아저씨 밤마다 비밀스럽게 힘쓰는 소리 아 귀 막아도 사정없이 들려오는 곳
술내가 그리워서 아픈 뒷얘기가 많아서 터놓고 살 비비며 살아가는 비린 소리 듣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찌그러진 세간 살이 잔뜩 싣고 누군가 이사를 온다.
골목 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구연배 시인 / 풍경 1
바람을 만나기 전에는 눈멀고 귀먼 온기 없는 물고기였다.
추녀 끝에 매달려 얼음장 같은 어둠을 꽝꽝 두드리더니 득음을 했나, 운다
바람을 깨치고 적멸보궁에 드는 무혈 목어
몇 개의 바다를 마시고 토해야 그 한 몸 유유히 건널 무심천에 이를까
환생의 절절함으로 꼿꼿해진 지느러미를 세우고 헤엄쳐 오르는 직벽의 세상은 소실점 없는 외길
서풍은 불고 홀로 가는 길에 풍경이 운다.
구연배 시인 / 풍경 2
한 번을 다녀가도 마음 같은 것 말고 껴안을 수 있는 몸으로 와주시는 당신이 눈물 납니다.
무시로 나를 흔드는 이여
당신의 손길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나도 모르게 노래로 울음으로 황홀케 하시니 고맙습니다.
한 아름 안고 토닥이며 사랑에 겨워하시는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사랑은/ 눈 뜨자마자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마음의 풍경을 가슴에 내가 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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