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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국 시인 / 하늘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6.
이상국 시인 / 하늘의 집

이상국 시인 / 하늘의 집

 

 

전깃줄에 닿는다고

인부들이 느티나무를 베던 날

아파트가 있기 전부터 동네를 지키던 나무는

전기톱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쓰러졌다

옛날 사람들은 가지 하나를 꺾어도 미안하다고

나무 밑동에 돌멩이를 던져주었고

뒤란 밤나무를 베던 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흙으로 그 몸을 덮어주는 걸 보았는데

느티나무의 숨이 끊어지자 인부들은

그 커다란 몸을 생선처럼 토막내 싣고 갔다

이파리들의 그늘에 와 쉬어가던 무성한 여름과

동네 새들이 깃들이던 하늘의 집을

그렇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이상국 시인 / 산속에서의 하룻밤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 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 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이상국 시인 / 별

 

 

큰 산이 작은 산을 업고

놀빛 속을 걸어 미시령을 넘어간 뒤

별은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지

 

처음엔 옛사랑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울산바위가 푸른 어둠에 잠기고 나면

너는 수줍은 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별을 닦으면 캄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이상국 시인 / 살구꽃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서문리 이장네 마당

 

짚가리에 기대어 피었습니다

 

지난 겨울

 

발시려운 새들 찾아와

 

앉았다 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피었습니다

 

 


 

 

이상국 시인 / 집은 아직 따뜻하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 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에서

 

 


 

 

이상국 시인 / 새벽강에서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무와 풀들이

서로 모르게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늘도 강에 내려와

찬물에 아랫도리를 씻는 새벽

누가 밤새 울던 소 같은 밤을

강가에 내다 매고 돌아간다

어둠을 내다 버리고 돌아간다

 

 


 

 

이상국 시인 /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끓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강원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 민족예술상 · 유심작품상, 2014.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유심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