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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시인 / 숲속의 정기세일
세일을 알리는 상수리 잎 한 장이 날아왔다 봄부터 여름 내내 준비한 상품들을 파워 세일 한단다 사은 선물로 신선한 공기도 있다 숲에 들어서니 상수리 나무는 살이 녹아내린 투명한 잎 사이에 탐스러운 열매들을 매달고 서있다 숲은 가끔씩 바람을 일으킨다 재고정리하듯 몸 흔들어 잎과 열매를 떨군다 떨어진 열매 사이에서 두 팔을 휘저으며 실한 열매를 고르는데, 손에 잡히는 건 벌레 먹은 상수리 알들 흥정해 볼 요량으로 나무를 발로 차다가 목 길게 빼고 허공을 보니 하늘이 시원하게 웃고있다 숲을 나서는데 온 몸이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덤으로 얻은 잎맥만 남은 나뭇잎이 건조한 내 손바닥 같다 상수리나무는 어느새 새잎 돋을 준비를 한다
-시집 <햇살 마름질> 2011년 서정시학
김선호 시인 / 개기일식
향기는 그늘에 젖지 않는다
차마 손도 못 대고 돌아서다 본 그, 말간 꽃 입술
부서지는 꽃 빛에 매일 젖던 몸
김선호 시인 / 길은 X염색체 사이에서 지워지고 있다
인간 게놈 지도를 사러 서점에 갔다 지방도로의 미세한 부분이 인쇄가 덜 되었으니 나중에 오라고 한다 내게 찾아오는 달거리가 차츰 뜸해 진다고 했더니 급하면 주소지 인쇄만 끝낸 지도라도 가져가라 한다 유전자의 길에서 나온 지도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길마다 두드린다 사춘기 이후 시작된 17번 국도가 형광물질로 희미하게 표시되어 있다 주기적으로 꽃피우는 일을 거부하고 싶었던 마음만큼 길을 서서히 지우고 있다 달마다 쏟아냈던 붉은 꽃잎들도 시든 채 비포장도로 중간 중간에서 내 숨결을 움켜쥐고 있다 씨방을 자라게 했던 사랑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나를 두고 떠나는 시간들을 찾아내어 색연필로 진하게 그려본다 몸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길마다 환한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김선호 시인 / 빙판
한 인연 끝내는 길 쇠심보다 질기다 밟히고 눌릴수록 불끈 불끈 솟는 오기 못 간다, 발악을 떨며 달라붙는 저 여자
백옥 같은 피부에다 맘씨도 곱던 그가 걸음새도 가만가만 숫기조차 없던 그가 한세상 바꿔 가는 길 광목처럼 늘인 집착
-《나래시조》 2023, 봄호
김선호 시인 / 속정續情
고봉밥 반쯤 남을 때 긴장감은 최고조다 손놀림 어눌하다고 방심하다 늘 당하다 한 술은 정이 없다며 다시 또 한 숟가락
요새 누가 굶느냐며 제발 좀 그만하라고 밥상을 전선 삼아 공방이 치열하지만 재래식 무기뿐인데 여지없이 함락되다
입맛이 깔깔하여 께적거리는 아침상에 사진 속 어머니가 '어여, 어여' 채근하다 치미는 목구멍 달래 꾸역꾸역 삼킨다
-《시조미학》 2022, 가을호
김선호 시인 / 일장춘몽
'허허, 팔자 폈네, 신수가 훤하네그려' 빈말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듣기 좋네 볼살이 통통해지니 어깨마저 으쓱거려
‘아니, 부은 거 아녀? 어째 쪼까 이상혀' 뭔 눈이 그러냐며 애써 깔아뭉겠구먼 기어코 부작용이라, '문페이스'라나 뭐라나
약 끊으니 삭신 쑤시고 붓기 빠지니 빈티 나고 어쨌든 그때 잠깐이 젤로 행복했구먼 제기랄, 그 환한 벚꽃 비바람에 다 떨구네
-《나래시조》 2019. 여름호
김선호 시인 / 어머니는 수의를 거풍 시키신다
환하게 피워 올린 목련 꽃 옆에서 빨랫줄에 걸린 흰 옷이 펄럭인다 어머니는 일 년에 한번씩 수의를 거풍 시키신다 서랍 속에서 꽃 피우길 기다렸다가 바지랑 끝에서 날리는 삼베 조각들 한때 꽃이던 시절 있었다고 준비해둔 수의를 봄날마다 목련 꽃잎과 견주시면 안동포 조각들이 목련 빛으로 물이 든다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사시다가 큰 맘 먹고 구입하신 평상시엔 입지도 못하는 옷, 꽃이 진 자리에서 더욱 빛나는 당신은 앙상한 손길로 남은 생을 미리 다독이신다 수의가 내다 걸린 하늘가 적멸로 가득차다
-시집 『햇살 마름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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