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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시화 시인 / 젊은 시인의 초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6.
류시화 시인 / 젊은 시인의 초상

류시화 시인 / 젊은 시인의 초상

 

 

아침에 할 일이 없는 날은

나도 쓸쓸하더라 할 일 없이

마음 속에 이런 저런 마음만 물밀어 모이고

일어서다 앉다 다시 누워 보는 내 머리맡에

푸른 고양이 한 마리 와서 머물더라

그런 날 아침이면 나도

그 고양이 푸르른 몸 안으로

숨고 싶더라

 

밤에는 또 기다려도 쉬이 잠이 오지 않더라

어두운 지붕과 지붕을 지나

고양이는 가고 오지 않고

누울 자리에 누워 있으면 낮게

누가 내 이름을 부르더라

 

 


 

 

류시화 시인 / 모란의 연(緣)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이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 탄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 한다는 것을

 

 


 

 

류시화 시인 / 새우깡에게 바치는 노래

 

 

새우깡이여

새우깡이여

나는 이제 너를 먹는다

너는 알맞게

고소한 맛과 짠맛의 농도를 조절하며

자극적인 맛을 점잖게 거절했다

나는 너의 겸손한 맛의 기품에 놀라

자꾸만 손이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넌 네 몸의 전무를 허락하고

이제는 빈 봉지가 된 존재로

내 앞에 다시 여운으로 남는다

 

새우깡이여

새우깡이여

나는 빈 봉지를 거꾸로 흔들어본다

네가 봉지 안에서

새큰새큰 잠자고 있을 때

 

나의 사랑은 풍요로웠다

난 네가 없으면

무료한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아이스크림과 초콜릿만으로 입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슬픈 일

 

어떻게 네가 그 많은 맛들을 물리치고

겸손한 새우 맛을 내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새우깡이여

새우깡이여

내가 심심할 때 즐겨 먹는 새우깡이여

나는 너처럼 되고 싶다

네가 늘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처럼

나도 늘 다른 사람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사람들이 심심할 때 위안이 될 수 있는 나

 

나는 그것을 너에게서 배운다

너무 달지도, 너무 짜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은

온유한 사랑의 맛을 낼 수 있는 나

 

새우깡이여

새우깡이여

너는 온몸으로 나에게 말한다

사람들의 입맛은 까다로워도

사람들의 감정은 변덕스러워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의 맛을 내야 한다고

새우깡이여

새우깡이여

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류시화 시인 / 아마릴리스

 

 

누군가 나를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묻었다

이듬해 봄에야 알았다

그것이 선물이었다는 것을

매장이 아니라 파종이었음을

 

 


 

 

류시화 시인 / 고독과의 화해

 

 

이따금 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기척이 난다

밖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문을 열러 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이

문 두드리는 것인지도

자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문 열 구실을 만든 것인지도

우리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에서

 

 


 

 

류시화 시인 / 홍차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를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힌디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빰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카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처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냈다는 것

노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 뿐

그리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

 

 


 

 

류시화 시인 / 겨울날의 동화

 

 

1969년 겨울, 일월 십일 아침, 여덟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는데

엄마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넌 아직도

잠만 자고 있니! 나는 눈을 부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이제 열 살이었다 버릇없는 새들이 담장위에서

내가 늦잠 잔 걸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외박 전문가인 지빠귀새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신발과 지붕들이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붉은 열매들이 있었다 가시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그때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가시나무에 앉은 텃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갑자기

어떤 걸 알아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지배하게 될 어떤 것이

작은 붉은 열매와도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내 생각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겨울의 마른 열매들처럼

바람 하나에도 부스럭거렸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는 얼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붉은 잎들 좀 봐. 바람에 날려가는! 저수지 위에 흩날리는

붉은 잎들! 흰 눈과 함께 붉은 잎들이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해 겨울의

마지막 남은 나뭇잎들이었다

 

 


 

류시화 시인

1959년 충북 옥천 출생. 본명 안재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0년 시 〈아침〉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 1988년부터 미국,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거나 인도 여행을 하며 라즈니쉬의 명상서적을 번역.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마음 챙김의 시>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경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