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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순 시인 / 시인과 농부 2
지금 한창 꽃이 이쁘니 보러 가자고 그가 떼를 쓴다 감자를 심기로 한 밭은 개망초가 하얗게 하늘거린다 군데군데 시뻘건 양귀비꽃과 노란 애기똥풀도 냄새를 풍긴다 감자를 심기로 하고서 왜 안 심었냐고 물어보자 감자를 심으려고 풀을 뽑으려 했는데 풀이 너무 이쁘더라며 그풀이 이렇게 꽃을 올렸다고 짜잔, 오히려 자랑을 한다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 물을 대 소독을 해야 하는데 미꾸라지며 우렁이이며 꼬물거리는 생명을 못 죽이겠다며 그만 벼농사를 포기하자던 그 그 논에 객토를 해 밭을 만들자던, 감자를 심어 감자를 구어 주겠다던 그.... 그와 함께 살면 굶을 수도 있겠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꽃송이를 머리에 인 채 거들먹거리는 잡초를 뽑는다 별들은 잉잉거리고, 앞산의 뻐꾸기는 뻐꾹뻐꾹 대는데.
성배순 시인 / 닭다리를 뜯으며
커다란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 영상을 보면서 닭다리를 뜯는 닭. 사냥감이 없어 쫄쫄 굶던 빙하기에 고기를 본 듯 게걸스럽게 뜯는 네안데르탈인 닭. 문득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모르쇠 하던 때, 옥황상제에게 돌아간 선녀를 지붕꼭대기에 올라 꼬끼오 부르던 때, 생각나는 듯 잠시 멈칫하는 닭. 아뿔싸, 닭다리를 방바닥에 떨어뜨린 닭. 잽싸게 후다닥 주워 먹는 닭. 닭다리가 아야 했다고 호호 불어주는 3살 난 아이. 가슴이 갑자기 콩닥거려 토닥토닥 안아주는 닭. 가슴 밑바닥에서 들리는 파닥파닥 날갯짓 소리에 술이 확 깨는 닭, 땀인지 기름인지 미끌미끌 축축한 손바닥 발바닥.
아, 자신을 참 맛있게도 먹는 닭.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0월호 발표
성배순 시인 / 우리는
한때는 바람이었다가 구름이었다가 흰 눈꽃으로 그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때 매일매일 만났는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그대의 향기가 낯설지 않았거든요. 먼 길 돌아 첫눈에 반한 우리 두 사람 비로소 오늘 두 손을 잡았지요. 비바람 속에서도 폭풍우 속에서도 부디 이 손 놓지 않기를.
우리 이제 서로 든든한 나무가 되기로 해요. 나무의 그늘만 고집하지는 않기로 해요. 밝은 햇빛만 사랑하지는 않기로 해요. 그대 하나로, 그대 하나로 충분히 환한 오늘이기를, 내일이기를 소망해요, 사랑해요, 그대.
성배순 시인 /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답답한 일 없이 시원하라고 분홍 모시 속저고리 입고 층층시하 틈에서 따뜻하라고 무명 솜저고리 하나 덧입고 그 위로 노랑 저고리마저 입고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다홍색 비단 치마 위에다가 연초록 활옷 걸쳐 입고 나풀거리는 넓은 팔소매에는 오색 색동천 달으셨네. 윤기나는 가채 위에 쓴 족두리 이것저것 흔들리는데 두 볼에 찍은 곤지 연지는 창백하기만 하네. 붉지만 하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 마당에서 한참 머뭇거리네. 삼베옷 입은 육남매의 노잣돈 밟고 개울 건너 밭고랑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흰 국화꽃 가슴으로 받으시며 엄니, 엄니 천 번을 불러도 기어이 엄니는 시집을 가시네.
성배순 시인 / 포란반
한낮 공원 벤치 위 서른 안팎의 여자 꽃무늬 블라우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연다. 동그랗게 드러나는 맨살 속으로 어린 아기, 연신 고개를 들이받는다. 지나가는 행인들 얼른 자리 피하고 어머나, 어머나 폐경이 된 지 오래된 아주머니 둘 야하다, 아름답다, 중얼중얼 실랑이한다.
나는 구멍 밖으로 얼핏 보이는 암컷 딱따구리 동그란 맨살............ 혈관이 모여 있는 곳의 따뜻한 체온 아기에게 좀 더 깊이 느끼게 하려고, 나무를 쪼던 부리, 악물고는 뭉텅뭉텅 붉은 깃털 뽑아 만든 쪼글쪼글 포란 반(抱卵斑).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연히 팽그르르 눈물 돈다.
성배순 시인 / 꽃을 보면 배가 고프다
머리가 반백인 당신 절벽 벼랑을 기어오르시네.
바위틈 철쭉 한 송이 입에 물고 내려오시네.
밀린 고지서의 숫자들 머릿속 가득 뒤엉키는데,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코 가까이 꽃을 주시네.
진분홍 독 잔뜩 품고 있어 먹지도 못하는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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