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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배순 시인 / 시인과 농부 2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7.
성배순 시인 / 시인과 농부 2

성배순 시인 / 시인과 농부 2

 

 

지금 한창 꽃이 이쁘니 보러 가자고 그가 떼를 쓴다

감자를 심기로 한 밭은 개망초가 하얗게 하늘거린다

군데군데 시뻘건 양귀비꽃과 노란 애기똥풀도 냄새를 풍긴다

감자를 심기로 하고서 왜 안 심었냐고 물어보자

감자를 심으려고 풀을 뽑으려 했는데 풀이 너무 이쁘더라며

그풀이 이렇게 꽃을 올렸다고 짜잔, 오히려 자랑을 한다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 물을 대 소독을 해야 하는데

미꾸라지며 우렁이이며 꼬물거리는 생명을 못 죽이겠다며

그만 벼농사를 포기하자던 그 그 논에 객토를 해

밭을 만들자던, 감자를 심어 감자를 구어 주겠다던 그....

그와 함께 살면 굶을 수도 있겠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꽃송이를 머리에 인 채 거들먹거리는 잡초를 뽑는다

별들은 잉잉거리고, 앞산의 뻐꾸기는 뻐꾹뻐꾹 대는데.

 

 


 

 

성배순 시인 / 닭다리를 뜯으며

 

커다란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

영상을 보면서 닭다리를 뜯는 닭.

사냥감이 없어 쫄쫄 굶던 빙하기에 고기를 본 듯

게걸스럽게 뜯는 네안데르탈인 닭.

문득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모르쇠 하던 때,

옥황상제에게 돌아간 선녀를 지붕꼭대기에 올라 꼬끼오

부르던 때, 생각나는 듯 잠시 멈칫하는 닭.

아뿔싸, 닭다리를 방바닥에 떨어뜨린 닭.

잽싸게 후다닥 주워 먹는 닭.

닭다리가 아야 했다고 호호 불어주는 3살 난 아이.

가슴이 갑자기 콩닥거려 토닥토닥 안아주는 닭.

가슴 밑바닥에서 들리는 파닥파닥 날갯짓 소리에

술이 확 깨는 닭, 땀인지 기름인지

미끌미끌 축축한 손바닥 발바닥.

 

, 자신을 참 맛있게도 먹는 닭.

웹진 시인광장202310월호 발표

 


 

 

성배순 시인 / 우리는

 

 

한때는 바람이었다가 구름이었다가

흰 눈꽃으로 그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때

매일매일 만났는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그대의 향기가

낯설지 않았거든요.

먼 길 돌아 첫눈에 반한 우리 두 사람

비로소 오늘 두 손을 잡았지요.

비바람 속에서도

폭풍우 속에서도

부디 이 손 놓지 않기를.

 

우리 이제 서로 든든한 나무가

되기로 해요. 나무의 그늘만

고집하지는 않기로 해요.

밝은 햇빛만 사랑하지는 않기로 해요.

그대 하나로, 그대 하나로 충분히 환한

오늘이기를, 내일이기를

소망해요, 사랑해요, 그대.

 

 


 

 

성배순 시인 /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답답한 일 없이 시원하라고

분홍 모시 속저고리 입고

층층시하 틈에서 따뜻하라고

무명 솜저고리 하나 덧입고

그 위로 노랑 저고리마저 입고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다홍색 비단 치마 위에다가

연초록 활옷 걸쳐 입고

나풀거리는 넓은 팔소매에는

오색 색동천 달으셨네.

윤기나는 가채 위에 쓴

족두리 이것저것 흔들리는데

두 볼에 찍은 곤지 연지는

창백하기만 하네. 붉지만 하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 마당에서 한참 머뭇거리네.

삼베옷 입은 육남매의 노잣돈 밟고

개울 건너 밭고랑 지나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흰 국화꽃 가슴으로 받으시며

엄니, 엄니 천 번을 불러도

기어이 엄니는 시집을 가시네.

 

 


 

 

성배순 시인 / 포란반

 

 

한낮 공원 벤치 위 서른 안팎의 여자

꽃무늬 블라우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를 연다. 동그랗게 드러나는

맨살 속으로 어린 아기, 연신 고개를

들이받는다. 지나가는 행인들

얼른 자리 피하고 어머나, 어머나

폐경이 된 지 오래된 아주머니 둘

야하다, 아름답다, 중얼중얼 실랑이한다.

 

나는 구멍 밖으로 얼핏 보이는

암컷 딱따구리 동그란 맨살............

혈관이 모여 있는 곳의 따뜻한 체온

아기에게 좀 더 깊이 느끼게 하려고,

나무를 쪼던 부리, 악물고는

뭉텅뭉텅 붉은 깃털 뽑아 만든

쪼글쪼글 포란 반(抱卵斑). 들여다보고 있자니,

공연히 팽그르르 눈물 돈다.

 

 


 

 

성배순 시인 / 꽃을 보면 배가 고프다

 

 

머리가 반백인 당신

절벽 벼랑을 기어오르시네.

 

바위틈 철쭉 한 송이

입에 물고 내려오시네.

 

밀린 고지서의 숫자들

머릿속 가득 뒤엉키는데,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코 가까이 꽃을 주시네.

 

진분홍 독 잔뜩 품고 있어

먹지도 못하는 꽃을!

 

 


 

성배순 시인

1963년 충남 연기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詩로여는세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미의 붉은 꽃잎을 찢고』 『아무르호랑이를 찾아서』 『세상의 마루에서』.  동화집 『세종호수공원』. 시비집 『세종.충남  詩香을 찾아서』. 제2회 푸른시인상(詩로 여는 세상 주관)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