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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연옥 시인 / 연의 집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6.
이연옥 시인 / 연의 집

이연옥 시인 / 연의 집

 

 

바람이 지친 지팡이로 허공을 깨우고

연이 급하게 파도를 짓습니다

둥글고 둥근 연잎들이

사공도 없이 파도를 저어 달리면

어둡고 험한 심연을 돌아봅니다

 

또르르 한 곳으로 모이는 어둠

 

바람이 붑니다

연잎 위를 구르는 물방울이

흩어진 검은 구름처럼 제자리에 모입니다

슬픔을 지우듯이

바람이 지나갑니다

나는 주저할 새도 없이

한 척의 배가 되어

지워지는 슬픔 속으로

연의 물결 속으로 떠갑니다

 

그 바다를 휘돌아 나오는

수많은 물방울의 배들

모여서 포구가 되고

한 채 한 채 집이 생기고

 

남경을 넘어오신

외롭고 쓸쓸한 발자국

관곡지를 넘어 범람하는

 

당신의 집

 

 


 

 

이연옥 시인 / 발굴

 

 

잠결에 그가 손을 잡는다

사십 년 함께 산 사람의 손인데

체온이 있는 따뜻한 손인데

버석이는 손이 닿는 순간

천 년 된 미라의 손을 발굴하는 기분이다

천 년 동안 허공을 항해한 배가

낡은 닻을 내리며

내 배를 더듬는 것 같아

고분 대신 화분에서 쑥 나온 손이 손을 잡는 것 같아

정박하려는 거 같아

나는 가만히 화분 속의 흙을 읽어 내려간다

손의 길을 쫓아 내려간다

뿌리가 닿은 자리에 닳고 닳은 손톱이 쌓였어

흙을 만지며 쌓인 손톱만큼 죽어가는 꽃을 보았지

죽은 자리에서 손이 자라났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

 

사십 년이 천 년처럼

미라처럼

알아보지 못했어

 

잠의 화분에서 빠져나온 손을 만난다

버석이는 손을 참례하며

발굴되지 않은 꽃을 발굴하는 밤이다

미라의 연인이 되는 밤이다

 

 


 

 

이연옥 시인 / 봄

 

 

그녀가 상큼상큼 걸어

스커트를 살짝 흔들고

한 쪽 눈을 찡긋하자

목동이 벚꽃을 연다

어떤 양도 꽃잎 흔들린 걸 눈치 채지 못한다

 

물결이 시치미를 뚝 떼고

 

움푹하게 앉은 양 한 마리

움푹하게 패인 웅덩이

꽃잎은 꽃잎일 뿐

목동은 목동일 뿐

웅덩이 속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물결이 눈을 꾹 감는다

 

목동이 패인 양을 지나 앉은 웅덩이 지나

꽃잎을 흩뿌린다 다시 웅덩이에 닿을 때

바람이 지나간다

그녀가 두 팔을 들고 스커트를 흔들며

휘익 돌아간다

분분이 일어서는 꽃잎이다

소용돌이치며 올라오는

 

받들어,

 

움푹한 양을 지나 꽃을 지나

바람이 분다

어떤 웅덩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연옥 시인 / 산수유

 

 

기다림에 시려 파르르 떤다

실핏줄을 타고

뿌리에서부터 올라온다

긴 한파를 잘 견뎌내고

보석 망울이 맺힌다

 

아픔이 있었기에

더 빛나는

예쁜 희망으로

온몸으로

봄의 생명을

황홀하게 안겨주는

당신

보고 있나요

 

 


 

 

이연옥 시인 / 시인의 눈빛

 

 

시인은 고양이다

호시 탐탐 쥐를 노리는

잽싼 눈빛

 

지루한 일사의 고뇌

순간 스치는 낮선 언어의 섬광

날카로운 갈고리의 펜으로

잡아들여 우리에 가둬 버린다

 

백지위에 나열된 언어들

시인의 오장육부를

가미싴혀 열을 가한다

여금 야금 은.미.한.다

 

마음껏 취한 느긋한 고양이의 눈빛

그 뒤에 번득이는 야망

시인의 눈빛은 고양이다

 

 


 

 

이연옥 시인 / 자서(自序)

 

 

손을 펴면 언제나 허공이다

허공이 깊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보이는 곳마다 흉터다

문자로 몸을 도배 하고

문장을 설치하고

의미들을 끌어 들인다

 

돌아보면

허공이 또 다른 몸이 나를 향해 다가선다

 

시집을 출간한다

오래오래 쓸쓸하던 허공의 한 쪽을 내놓는다

 

 


 

 

이연옥 시인 / 전문(文), 전문(戰聞)이다

 

 

물큰, 햇살 한 덩이 떨어지자

한무리 군사가

움찔 잠을 깨기 시작한다

아무런 방비도 없던 산이

몸을 틀기 시작하고

꼭대기에선 잠든 수문을 향해

시동을 수신한다

 

산 아래 발가벗은 나신들이

서둘러 입성을 준비하고

풍신수길(風神水吉)

이 백만대군의 봄비와

아지랑이 앞세워 쳐들어온다는 소문

어서어서 몸을 추슬러야 하는데

조조(早朝)가 백만대군을 앞세워

만면에 웃음을 터트리고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화려한 깃발로 요동을 친다는 전문이다

 

모든 판세는 이미 정해진 것

꽃샘추위와 전면전을 치룬

수많은 꽃잎 전사들

꽃술을 불쑥 치켜들고

봄의 진영을 뚫고 있다.

 

 


 

이연옥 시인

경기도 시흥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 《문학공간》 시부문 신인상, 2010년 계간 《예술가》에 시를 발표하고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연밭에 이는 바람』 『나비의 시간』. 전 시흥문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