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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자규 시인 / 붉은 절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7.
이자규 시인 / 붉은 절규

이자규 시인 / 붉은 절규

 

 

핏대 세우고 달리는 차

속임수 하늘 창에 부딪힌

새의

희망심장이 차창에 터졌다  

 

새들은 새일 뿐

공해항로를 모른다  

 

빈 종이컵만 나뒹구는 길가

핀 제리세이지 핏방울 꽃

꽃이 아니다

노래를 잃고 비상을 잃고

울음 나부끼는 날갯죽지 위로

먼지바람이 흩어가고 있다

 

 


 

 

이자규 시인 / 간이역에서

 

 

나, 그냥 한 번 쉬고 싶었어

가던 길 다시 한 번 돌아보듯이

제 키만큼 깊게 담겨지고 싶었어

감성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백신처럼

영혼을 뒤흔드는 한 사람 찾아서

생을

그냥 기대보고 싶었어

머릴 관통하는 기적소리를

그 누가 나무라겠는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그냥 바라보고 싶었어

살아가다 한 번쯤 뒤돌아보게 되는

간이역에서 기차울음도 들으면서

잠시 쉬어가는 삶을 떠올려 보았어

아무 근심도 없이

 

 


 

 

이자규 시인 / 다림질을 하면서

 

 

구겨진 모직원피스를 다리면서

할부금 갚듯 하루치의 우울을 지운다

다리미질 할 때마다 지워지는 주름살들

눌러 붙은 밥풀을 떼는 일도

얼룩을 두려워하는 질긴 희망이다

실꾸리를 풀어놓은 늦은 가을의 여명

여름 내내 젖어 있던 문짝들이 말라가고

나도 말라가고 있다

예전에 잃어버린 신발은 지금

강의 어디쯤 떠내려가고 있을까

신발을 잃어버린 나만 여기 남아

가보지 못한 강가에서 자란

씀바귀, 여뀌 풀 꿈속에서

해거름까지 서성이다 돌아온다

가끔 모직원피스를 태워먹으면서 말이다

 

 


 

 

이자규 시인 / 고목

 

 

언덕바지 끝에는 언제나 그가 있다

물뱀 보고 아빠 팔에 매달리듯

저 먼저 어리광을 뺏어 가지에 매다는

이참에 칡넝쿨이라도 되랴

길의 극지를 더듬어 울퉁불퉁

세월 다진 그가 등을 내주는데

그래 둥지 없이 드난살이 하는 철새처럼

그의 응달 어디쯤 한 잎의 깃털로 매달려

늦게 도착한 빛살 천천히 아껴먹고 싶다

나는 내가 싫어서

쓸어안고 그냥 흔들고 싶다

살다 살다

오래된 나무를 보면

가만히 기대고 싶다

 

 


 

 

이자규 시인 / 오디와 번데기의 계보학적 고찰

 

 

 세상 뜬 할머니가 든 주머니를 풀었다 애걔걔 기껏 헝겊조각이야, 열 살 리본머리가 꼬마주머니를 다시 걸고는 볶은 번데기를 먹는다

 옹골찬 깨끼곱솔 박음질 수의의 가위 밥들, 그의 물레와 베틀과 뽕나무밭 길 그의 영혼들을 모셔둔 오색실비단주머니가 공출시대를 머금고 내려 본다

 고즈넉한 저녁이면 누에방의 사각사각 빗소리 닮은 생음악은 푸르디푸른 꿈 색이었으므로 어제의 어둠도 함께 가벼워졌으므로

 

 너를 끓이고 너를 기워 입고 너를 갈아 마시는 나는 할머니가 없다

 깨알보다 작은 알에서 고물고물 다섯 잠까지 뽕밭을 부를 때마다 키 크는 소리

 숙잠 섶에 누일 때면 진보라 오디 한 입으로 내가 철없이 보챘을 때 손이 바쁜 침묵의 다스림들, 벌레의 기나긴 심줄이 공사를 시작해, 집을 신축 중인 것도 몰라

 허공을 경작하는 노동은 홀로 쓸쓸 하다 몸이 점점 작아지고 주름질수록 둥글어지는 고치방, 고립건축으로 봉인된 우주의 방은 인간세상을 향한 줄 탁 공법을 시작했다

 물렁한 척추를 힘껏 곧추세울 때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의 한 때를 방적하는 기술, 베틀을 거친 익충의 영혼은 살아서 숨 쉰다 다 짠 명주를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로 밤새웠던 할머니

 명주스카프를 두르며 제 몸을 세상에 바치는 광시곡처럼 부드러운 어느 손의 영혼을 듣다 영원한 펄럭임으로

 

-《서정과현실》 2018. 상반기호

 

 


 

 

이자규 시인 / 산

 

 

누가 먼저였을까 열려진 문과 찾아간 이름의 관계

우린 그렇게 만났다

 

내 눈으로 비친 언어와 당신 귀에 들리는 풍경의 침전

가지 꺾인 폭설과 뿌리 뽑히는 태풍의 커가는 사랑이란

 

어느날 비를 몰아내고 별과 함께 오는 밤의 낭독

필연은 우연처럼 오는게 아니라는 짐승들의 몸짓 따라

 

전 생애를 푸르고 푸르게 흔들어 깊어졌을 때쯤이면 나는

당신 품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이자규 시인 / 고고杲杲

― 유협 『문심조룡』 물색 편에서

 

 

그것은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

 

내 눈을 뺏어간 마당은

이미 태양의 간을 발라 피를 뿜는 중이다

내 시신경을 잡고 요요거리는 마당에 이윽고

간밤의 상처가 안경 벗어놓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꽃병 없이 낱말도 없이 문장이고 물관인 당신,

자욱하다

 

바람이 거세되고 기진한 밭이랑을 감싼 흙

산비알에서 온 살점들은 옥토의 추상형

석류꽃들 벌고 오이꽃 피고 긴말 전하지 않아도

푸름으로 알아듣는 남새가 있고

빛과 그늘에 죽고 사는 이파리가 낭자하다

 

다친 마음은 눈이 밝아서 경물의

기와 운으로 음양을 깃들이고 있는

당신

열린 수정체 너머 내 망막으로 버거운 햇발 노 맞고 서서

이 빛의 가무, 흥건하다

 

미망 속 영세한 내 문장에 남세스러움만 내려다보고 있을

무위의 당신 가득한 물색

 

―시집 『붉은 절규』 시산맥사 2025. 3.

 

 


 

 

이자규 시인 / 뱀이 허물을 벗는 시간

그것은

기척도 없이 약간 그늘져야 가능한 일이다

복권이 당첨된 하반신장애의 오후처럼

낯설어지는 감정세포에서였다

헛구역질이 뜬금없는 뱀의 혀 같고

무시래기 삶는 냄새

새로 연 팥칼국수집 나박김치냄새

달포 내내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비워진 채

한낮의 유등연지 움직임 없이 앉아있는 나

하반신을 마비한 채로

무늬와 얼룩의 혈거시대를 생각하다가

옛 거제포로수용소시인을 읽었다

목숨사방을 경계하다가 방어포착에 조준 했다는 것

위기를 모면했던 영어가 그의 보호색이었던 셈

사진 속 그의 커다란 눈이 연봉오리 닮았다

시신경이 진흙 어디쯤에서 역동 했을 터

쓸모없는 지폐처럼 풀은 풀로써 제 몫을 다해

몸으로 언어를 보이는 파충류를 보면 안다

내가 기어간다면 바닥의 진동을 듣는 아래턱과 내 이가

더욱 새로워질 것이다

ㅡ계간 《시인시대》 (2023, 여름호)

 

 


 

이자규 시인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2001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우물치는여자』 『돌과나비』 『아득한 바다 한때』 『붉은 절규』. 현재 대구시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