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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일 시인(서울) /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7.
김승일 시인(서울) /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김승일 시인(서울) / 시는 시를 짓밟지 않는다

 

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시는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시가 바라던 꿈은 무엇일까

힘센 것들을 우르르 따라갈 때

시는 힘센 것들을 따르지 않는다

연역한 것들을 더 연약하게 할 때

시는 죽어 가는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

더러운 상을 바라지 않는다

무수한 권력의 허망한 이름들을 향하여 박수칠 때

시가 맨 처음 바라던 꿈은 무엇일까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가는 시의 영향력

여기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시라는 이름의 영향력

영향력 있는 것들을 좇지 않는다

시 아닌 것들이 영향력에 굴복할 때

시는 스스로 한번도 보지 못한 영향력을 만들어 낸다

목소리 같은 반지를 약지에 끼우고

홀로인 시는 걸어간다

시 아닌 것들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는 아직 오지 않은 시를 위하여

그러나 오고 있는 시를 향하여 노래한다

과거의 시는 현재의 시를 짓밟지 않는다

현재의 시는 과거의 시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시는 뭉쳐 미래를 모의하지 않는다

홀로 온 시가 혼자 가듯이

시를 쓰고 있는 사람에게서 아무도, 아무것도

시가 맨 처음 꾸었던 꿈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김승일 시인(서울) / 동경​

 

 

 당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가 서로의 웃음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헤어질 때는 포옹을 하면 좋겠군요. 이게 다 당신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꿈꾸는 일이겠지요. 당신을 잘 알게 되면 좋겠군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었으면 좋겠군요. 당신이 죽은 다음, 당신과 함께 웃고, 헤어질 때마다 포옹을 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당신이 죽기 불과 며칠 전에, 나는 문병을 가게 될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내가 당신의 병상에서 떠났으면 좋겠다고, 이번엔 포옹도 없이, 그냥 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어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척 슬프겠지요. 지금 나는 딱히 누군가를 동경하지 않고,그러니까 지금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나는 문병을 가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주 우울하고 슬픕니다. 당신을 상상했어요.

 

 


 

 

김승일 시인(서울) / 아, 따뜻하고 더러운 시간의 손길​

 

사랑해 햇빛이 쏟아져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사랑해 사랑해 손끝마다 결과가 생겨나게 될 거야

너를 보고 마음이 생기는 것이 슬퍼

심장이 뛰게 되고 손가락이 생겨나서 그 손가락 끝에

만지고 싶은 얼굴들이 자꾸 생겨나서

봄이 온다 꽃이 핀다 벌어진다

따뜻한 손길에 어김없이 젖는 것들을 봐

고정된 나비처럼 할 말 없는 입가

압핀을 전부 쏟아 내 웃는 표정을 사진 속에 박아 버려도

꼭짓점으로부터 시간이 흘러내린다

만져 주고 고마워 한없이

고마운 마음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손길

베인 곳에서 쇠맛이 나는 이유를 우리 따위가 알 수 있겠니

표류한 배는 나아가기 위해서 제가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있는데

당장 지혈해야 사는 자의 심장이

더 맥박 치는 이유가 뭘까

문을 찾기 위하여 더러운 벽을 손끝으로 스치며 지나는 중이야

잘나가던 사랑은 박살나고

오늘은 가수지망생이 자살한 날이기도 해

멀리까지 가 연탄을 피웠대 우울했대

참 별일 없는 햇빛

서로서로 죽은 애인만 쓰다듬고 있는 정오로구나

내 사랑이 더 슬퍼요 좀 봐여 내 죽은 애인을

엉엉 운다

낙엽 하나가

빠르게 지나가는 덤프에 힘입어

구르고 점프하고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 바닥에 납작 붙을 때까지

모든 기적은 제 안에서만 일어나고

모든 기적은 제 안에서 일어난 것들을 절대로 소문내지 못하고

그 위로 다시 덤프 지나갈 때까지

-시집 『나의 미로와 미로의 키스』 중에서

 

 


 

 

김승일 시인(서울) / 우리, 미안하다고, 하자

 

 

 학습능력 떨어지는 지진아 모질이들 조롱하면서 학생들 뒷담화에 신이 난 선생이 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선생니이임 따르는 학생들을 뒤통수치는 선생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모두 자라나는 녹음기, 아니 휴대폰이에요 동영상 촬영 중이랍니다 초! 고화질로 싸대기를 맞으시렵니까 다들 꺼내 휴대폰 그러니까 말조심하세욧 앙기모띠 에바참치 씨발 선생아 어쩔티비 여기까지는 도덕이나 윤린데(윤리 선생이 그랬다고는 정말로 말을 못 하겠고)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지금부터는 범죄 시이작!

 

 애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온다고 눈을 얻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진심 허벅지에 앉으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선생이 있다 축법소년 축법소년! 어차피 미성년자라고 씨발것들이 학폭위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학생들이 있다 가끔 들통이 나서 직위 해제되는 괴물들을 보라 이번에는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했다가 몇 년간의 해프닝이 끝나면 뻔뻔하게 교단으로 기어나오는 자가 있다

 

 다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날 어떻게 벌줄 건데 씨발”  

 

 닮아 있는 꼬라지를 보라

 

 하긴 해마다 손찌검하는 존재들을 교실에서 복도에서 지겹도록 만났으니 우리는 모두 산교육의 피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는 인정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애는 때릴 애가 아니에요 우리 애는 공부도 잘하고 우리 애는 결석도 안 하고 우리 애는 황금빛, 꿈이 있는데, 우리 애가 어떻게 사람을 때려요? 지금도 그 생각 변함이 없어요 어디 가서 처맞지 말고 차라리 때려!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시인의 일요일, 2022.

 

 


 

 

김승일 시인(서울) / 인간이 되어 가는 저녁

 

 

커터날이 부러져 버린다

 

몇 번 긋지도 않았는데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시인의 일요일, 2022.

 

 


 

 

김승일 시인(서울) / 나의 정강이에는 산맥이 들어가 있다

이쯤에서 나의 이름을 부를 줄 알았어

군홧발이 만들어 낸 뼛속

차에 치인 아이의 과자봉지처럼

무엇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어

움켜쥐었다가 놓친

인간성이었어

정강이에 새겨진 걸

낭독하고 있어

아이를 치고 달아나는

뺑소니차의 번호판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똑똑히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2022년

 

 


 

 

김승일 시인(서울) / 죽은 자들의 포옹

 

 

말 없는 너를 보고 있어

녹화된 화면 속

말없이 뒤돌아서는 너를 보고 있어

네가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네가 행복하고 싶어서 붉은색 꽃 장식이 달린 난간에가 선다면

나는 듣고야 말 거야 나는 너의 이야기를 안고 더 멀리 걸어가고 말 거야

노을은 날아가고 새들의 귓불을 가볍게 쓰다듬고

구름은 구름대로 너의 눈동자를 위로하겠지

 

고개를 들 거야 나는

손바닥을 치켜든 그 개새끼 앞에 서고야 말 거야

울먹이며 나를 하나하나 모조리 기억해 내고

 

키스

 

그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할 거야

나와 그의 몸 전체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희망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거야

나를 떠나 멀리 날아가 버린 풍선과

나를 찌르고 땅에 떨어진 녹슨 쇠꼬챙이 사이에서

무엇이 욕설처럼 벗겨지는지

 

그에게 분명히 말해 줄 거야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을 만날 수 있다면

 

햇빛 같은 웃음이 나올 텐데

 

수백수천의 발판을 거슬러

모든 쓰러진 과거를 한 번 더 쓰러뜨리며 잠시요를 연발하며

되돌아 내려가는 방법을

찾고야 말 거야

모든 것이 최후에 드러나기 전에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가장 높은

 

숫자가 적힌 버튼을, 다시 누르기 전에

 

 


 

 

김승일 시인(서울) / 설탕과 여호와의 증인

 

 

때론 설탕이 녹아내리고

때론 기적처럼 찻잔이 엎어진다

 

식탁 위에 눌어붙는 설탕

 

설탕은 남는다

 

초인종을 하나하나 누르다가 멈춘

여호와의 증인처럼

 

나는 서 있다

새카만 결정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며 낮과 밤으로

뒤엉킨 전선과 기울어진 전신주와 깨진 가로등을 믿으면서

 

정수리를 두 쪽으로 가르는

바람을 맞으며 갔지

 

수백 페이지 중

한 장이 넘어갔지 두꺼운 양장본에 발등을 찍혔지

 

설탕에 절여진 석양빛 그 아래

고인 흙탕물과 방치된 자동차와 다닥다닥 붙은 집들

 

대개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김승일 시인(서울) / 화사한 폭력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날 때린 너 날 끌고 온 너

친구였다

얼굴을 쳐다봐 새끼야 그림자 속에서

너의 목소리 주먹 날아올 때

나는 담장을 넘는 공을 보았다

수풀 속으로 들어간 공을 상상했다

심장 소리가

날 때린 너에게 들렸을 거라 생각했다

심장 소리가

날 때리는 너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눈물이 되었다 아교가 되었다

곁눈질로 자목련을 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개나리꽃들이 있었다

할 말이 없냐고 너는 물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꽃대가 휘어졌다

꽃대가 사방으로 휘어져 깊이깊이 나를 찔렀다

어떤 힘으로 나는

나를 예감했을까

멀리 날아온 꽃잎 하나가 너를 스치고 비스듬히 지나가는 풍경으로부터

운동장에 얼굴을 처박는 꽃잎들

끌려온 자목련 끌려 나온 개나리를

나뭇가지 안에 넣어 두고 싶었다

사월의 담장 안으로 거두어 주고 싶었다

나는 너의 신발 뒤축만 살짝 보았을 뿐인데

귀가 뜨겁고 얼굴이 노랬다

햇빛 속 운동장을 가로질러

날 끌고 나온 너

같이 밥을 먹던 너

갔다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발이 타격하는 축구공처럼

꽃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사월이었다

​​

-시집 『프로메테우스』에서

 

 


 

 

김승일 시인(서울) / 시가 낸 창문으로만 밤을 건너간다

 

 

밤의 이면이 보이는 것을 모른 척하면서

다른 밤이 다른 어둠을 끌고 저희들끼리 사는 모습을 방금 세 번 모른 척한다

같은 테이블에서 손금이 손금을 넘나드는 풍경 또한 다른 우주일 것이다

어떤 창문 밖에서는 비명이 틀리고

북두칠성은 한 사람의 머리 위로 펄펄 끓는

희망을 부어 버린다

 

나는 증오를 갖게 한 사람도

희망으로 펄펄 끓어 뼈밖에 안 남은 사람도

친구로 두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내가 낸 창문 속으로

또 한번 진실하게 쓰러져야 한다

 

밤을 더 짙게 있는 머리카락들 머리카락에 걸린 약지들을 툭툭 끊어 버리고

나는 나아가려고 맨발로 뛰어 들어온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사람이 아닌 동식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 행성을 휘둘러보는 것이다

 

고양이가 맨발로 다가오는 밤

너는 왜 피가 나니

너는 왜 아직도 울 힘이 남아 있니

 

레이블에서 테이블로 뛰어넘을 때 뒤에 있던 테이블은

위에 올려놓은 유리잔들을 죄다 쓸어 바닥에 쏟아 버리고

쏟아 버렸으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는 새로운 우주가

충돌 직전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들고 있는 과거를 용납한다

 

다 떠나간 자리에서 테이블을 다시 깨끗하게 치우는 손들은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힘인가

암흑 같은 에너지인가

내가 떠나온 행성 속에서는 아직 사람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저희들의 삶을 사랑하고

나의 친구들 나의 스승들 나의 사람들의 노고 위에

그 토양 위에

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는 밤의 놀이터 안에

나는 홀로 빠져나와 있는 새하얀 하나의 뼈

 

검은 도화지 위에서는 희게 그은 선이 필요한 듯

백지 위에서는 검은 밑줄이 필요한 세상

 

모든 나무는 생각나게 하는 절망과

생각나게 하는 증오와

생각나게 하는 그날의 모든 이파리를 건너

거기에 맞는 밑줄을 긋고 간 유성이다

유성의 고향이다

 

정교하게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우주를 가로지른다 나는 무엇인가

맨발이 되어 등에 올라탄 터럭이 되어

어디까지 올 수 있을까

 

정신이 분열되어 떠나간 사랑이 분명히 있다는 밤

분열된 조각을 맞추다가 마주치다가 고개를 떨군 한 사람이 우는 밤

흔들리는 말 위에 앉아 홀로 나무를 쳐다본다

아무리 어두워도 자신이 나무라는 걸 한 번도 숨겨본 적이 없는 나무 앞에 나는 발가벗겨져 있다

왼쪽으로 왼쪽으로 내가 기울어지고 있다

차오르고 있다

 

무수한 잎사귀들을 꿰고 둥치에 박힌 화살은 누가 쏜 시간일까

화살을 쏜 사람은 수풀 속에서도 소리 내지 않고

오랫동안 반질반질 빛이 나는 이면들을 닦아 내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현재가 되는 화살

모든 잎사귀의 귓바퀴를 하나도 찢지 않고 날아와 박힌 한마디의 말

내 사람의 유언이

내가 낸 창문으로만 나아가는 밤이다

고백이든 용서든 변명이든

말을 담고 있는 입술은 활시위일까

 

나는 어떤 고백을 해야 하며

나는 어떤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변명 가운데

다시 어떤 재회를 준비해야 하는가

 

나는 진실로 그 반성을 내 심장 곁에 둘 준비가 되어 있나

그리하여 나는 한 가지를 오래 들여다본다

내 사람들의 박수를 지나서

내가 보여줄 마지막의 떨림 마지막의 밑줄 마지막의 입술이 전할

그 한마디는 여기로 오고 있다 지금도

 

오지 않은 시가 있다.

모든 것들을 화해하게 하려고

모든 것들을 다시 증오하게 하려고

잿더미가 된 뒤에 사랑이

사랑이 가장 무수한 숲을 거느리고 있다는 걸 알게 하려고

내 귀에 속삭이려고

 

활시위를 놓지 않고 떨리는 밑줄이 있다

활시위를 놓지 않고 올리는 사람이 있다

 

 


 

김승일 시인(서울)

1981년 서울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과,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2007년 제11회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등단.  시집 『프로메테우스』, 낭송시집 『어른들은 좋은 말만 하는 선한 악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