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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상 시인 / 물구라는 나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8.
김수상 시인 / 물구라는 나무

김수상 시인 / 물구라는 나무

 

 

참 희한한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세계를 다시 세웁니다

 

이 나무가 되면

 

꼭대기가 바닥이 되고

바닥이 꼭대기가 됩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지요

 

높아 있던 건 낮아지고

낮아 있던 건 높아집니다

 

전도몽상의 세계가 뒤집혀

잠시 잠깐 진리를 엿보게 됩니다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면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면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당신이 미워질 때 물구나무를 서보고 싶다

 

물구라는 나무가 되지 못해서 불구가 된 나무

오래된 피가 더럽습니다

 

머리를 열심히 땅에 박습니다 형벌처럼

얼굴이 벌게지는 것은

어리석은 나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김수상 시인 / 난관에게

 

 

세면대가 막혔다

관은 빠져나가라고 만든 길

일자로 만들면 될 일을

왜 구부려 놓았나

그건 전문가에게나 물어볼 일

물이 한 일은

그저 관을 따라 흘러간 일

물은 한 번도 관을 의심한 적이 없네

난관의 짝은 봉착

물에게만 내어준 길을

물 아닌 것들이 따라 들어가

오물덩어리가 된 것

쭉 뻗은 길만 있다면 무슨 재미인가

사는 일은 난관 쪽으로 나있다

인간의 창자가

구절양장으로 굽은 까닭이 다 있다

 

-시집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 시와반시, 2019

 

 


 

 

김수상 시인 / 고관(高官)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자꾸 생각나다

형편이 어려워질 때마다 수정동 고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밥벌이 때문에 가기 싫어도 할 수 없이 내려간 부산

매트리스 하나 겨우 들어가는 여인숙을 개조한 달셋방

나 같은 사내들이 혼자 사는 곳

맞은편 초량의 산복도로엔 벚꽃이 한창이었다

두고 온 어린아이들 생각에

물에 맨 밥을 말아 먹어도 목이 막혔다

상조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건너편 초량의 산꼭대기 집들의 불빛을 부러워했다

피어나는 산벚의 분홍구름 떼

꿈인 듯 생시인 듯 그때는 담배를 참 많이도 피워댔다

인생은 괴롭다는데 나도 빨리 구름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순서를 기다리던 공동 세탁기

그래도 옥상에 널린 사내들의 빨래는 깨끗하였다

초량에는 돼지갈비 골목이 있고

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주는 감자탕 집도 있었다

고관에는 오래된 목욕탕 굴뚝만 아득히 높았고

고관(高官)도 대작(大爵)도 볼 수 없었다

흘러가는 흰 구름, 흘러가는 산벚의 연분홍 구름들,

흘러가는 초량의 백빽한 가난들,

고관의 달셋방 옥상에서 바라본 초량의 산복도로 산벚은

불에 덴 자국처럼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다시 가난해질 때마다 나는 고관의 달셋방 옥상을 생각한다

나빠지려고 할 때마다 고관 옥상의 흰 빨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김수상 시인 / 돌

 

엎드려서 시를 쓰는 시간

사물들은 각자 자기만의 알을 낳는다

돌은 꿈의 알들

꿈은 여기 있는데 알은 저기 있다

잠을 못 자서 푸석한 돌

사기꾼같이 뺀질뺀질한 돌

물에서 갓 태어난 말랑한 돌

책꽂이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에서 돌을 많이 낳고

잠에서 깨지 않는다

꿈이 다 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돌은 꿈을 하나씩 품고 있다

시를 쓴답시고 괜히

돌의 잠을 깨우지 말아야 한다

엎드려 실눈을 오래 뜨고 있으면

돌이 모르는 곳으로 데려간다

 

 


 

 

김수상 시인 /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것들

 

물기가 다 빠졌다

떨어진 후에도 이러 저리 굴러다닌다

비가 오면 젖고 다시 마르고

밟히고 차이고 쓸려 다녀도

아야, 소리 한 번 없다

낙엽의 일생이나 인간의 일생이나

거기서 거기

삶이라는 나무에 악착같이 붙어 있다가

결국엔 떨어진다

떨어질 때 아프지 않으려면

악착의 물기를 다 빼야 한다

 

 


 

 

김수상 시인 / 처지다

 

절 마당에 수양매실 환하다

휘휘 늘어졌다

어떤 가지들은 땅에 닿았다

꽃으로 잘 엮은 주렴 같다

봄바람에 마음을 다 내주었나

느릿느릿 마당을 쓸고 있다

이제는 처지는 것들이 좋다

솟구치는 것들의 진절머리,

힘 풀고 아래로 아래로만 나붓거리는 마음이여,

생각 없이 사는 유순한 마음이여,

늘어진 꽃가지 사이로

내 마음도 한 가지인 양

척, 감겨든다

 

 


 

 

김수상 시인 / 바닥이 밑천이다

 

실직이 오래라고 하니 누가,

그래도 용기를 가지라고 했다

나는 밑천이 바닥이라고 대답하였다

바람 부는 공원에 나가 병든 병아리처럼

봄볕을 쬐며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밑천이 바닥이 아니고

바닥이 밑천이었다

나는 늘 바닥을 향하여 바닥바닥 기어가는 사람

바닥이여,

내가 일부러라도 사랑한 궁핍의 바닥이여

 

-시집 <편향의 곧은 나무>에서

 

 


 

김수상 시인

1966년 경북 의성 출생.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시 전공 (중퇴). 2013년 계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사랑의 뼈들』 『편향의 곧은 나무』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 『물구라는 나무』. 제4회 박영근작품상 수상. 전 월간 『우먼라이프』 기자. 현재 대구경북작가회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