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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생 시인 / 얼음 사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9.
김생 시인 / 얼음 사진

김생 시인 / 얼음 사진

 

 

없으므로 위대해졌다

없으므로 유용해지고 없으므로 나는 너를 되풀이한다

이미 닿았다가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너는 작은 조리개 구멍으로 숨어 들어온 빛처럼 환하다가

도저히 찍힐 수 없는 환영幻影이 되기도 했었지

멀어서 더 높고 높아서 너는 내게 없다

시간이라는 육체도 없는 것에서 흐느낌이 들려온다

너를 내 방식으로 해석하고 너를 수없이 인화하는 동안

시간은 물이었다가 얼음이었다가

이윽고 물이었다

가장 멀어서 꿈에 보이는 사람아,

눈발 날리는 오류역에서 다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올 수 없으므로 해서 그리움의 가속도로 오고 있는

피로한 너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시집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에서

 

 


 

 

김생 시인 / 잠

 

 

닳은 너의 얼굴이 잠의 난간에 걸쳐 있다

 

백지처럼 찢어지기 쉽게

 

잠을 쌓아 너에게 간다

 

바스러질 것 같은 고요를 밟고 꾸었던 꿈을 끌어안고 간신히 간다

 

잠은 끝내 오지 않고 나만 홀로 잠에게 간다

 

잠의 길은 내 기억이 매설한 은밀한 회로여서 위태롭게 아름답다

 

유일하게 지상의 슬픔을 최적화한 잠

 

나에게 너를 세습하는 잠

 

잠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김생 시인 / 희미해질 것 같은

 

 

오래된 강기슭에 사슴은 없고

 

사슴이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봅니다

 

사슴을 만나려고 했는데

떠난 사슴은 무심합니다

 

나는 퍽, 현실적이어서

시선은 어긋납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잠으로 깊어진 방을 둘러봅니다

 

배경은 어두워도 보이고

밝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구술한

먼 옛날로 뗏목을 타고 떠내려가면

한 아이만 있습니다

 

희미해질 것 같은

 

수천 번을 만지며 지나가 본

내가 있습니다

 

-《시인동네≫ 2020. 5월호

 

 


 

 

김생 시인 / 장미

 

 

폐업한 초원 다방 담벼락

못으로 긁어 쓴 욕을 덥고 장미 피어 있다

 

아름다움의 포박을 풀고

햇빛의 타격을 시퍼렇게 받으며

온몸에 누적된 맷집으로 핀다

 

쟁반의 장미가 피고

오토바이에 장미가 피고

칼에 그려진 장미가 핀다

 

버려진 말들로 송이송이 피는 초원의 장미

눈에 붉은 선팅을 붙이고 백지처럼 달린다

 

펄럭이는 관계를 버리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다정한 세계를 털어버리고

질펀한 증명이 필요 없을 때

장미는 장미답게 핀다

 

피는 것은 전속력으로 그늘을 저장하는 것이고

피는 것은 혼자만의 길로 조용히 건너가는 것이고

피는 것은 죽음을 맛보고 돌아온 자의 술회이므로

피면서 첩첩이 소거된 나약한 즐거움이 있다

 

검푸른 잠으로 모든 시선에 그늘을 치며

붉은 욕처럼 초원의 장미는 핀다

 

-《시인동네>2017. 5월호

 

 


 

 

김생 시인 / 바나나킥

 

 

떠나는 그에게서 앞과 뒤가 잘린 사과를 받았습니다

간밤에 제를 올린 사과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처음 무언가를 접촉해보는 사람처럼

마지막을 만져보는 사람처럼 없어진 사과의 앞과 뒤를 더듬었습니다

 

받은 사과를 맛있게 먹는 일은 중요합니다

 

풀냄새가 나는 사과를 씹으며 칼을 지나온 사과를 생각했습니다

 

뒤끝 없는 사과에 몰두한 나머지

찻집 유리창에 상영되는

펄럭이는 웃음 하나를 골라, 슬쩍 빌려 썼습니다

더빙영화처럼 우리의 대화는 겹쳐질수록 더 멀어졌습니다

 

사과는 던지는 자의 몫이 아니라, 받는 자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서리를 가볍게 걷어 올렸을 뿐인데 골문을 흔드는군요

 

 


 

 

김생 시인 / 절규

 

내 입은 젖은 황토

찐덕찐덕하네

당신을 부르면서 포기하네

당신을 부르는 것은

당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일

들어가도 들어가도 당신은 없네

올 것들이 다 오고 갈 것들이 다 가고

당신을 버리면서 당신을 부르네

나는 찌그러진 원 하나를 입속에 끼워 넣고

희망없이 누적되는 당신을 부르네

 


 

 

김생 시인 / 목련이 질 때

 

 목련을 오래 보았다 보이는 대로 보았다 유령의 송곳니였다가 작은 새였다가 조등이었다가 목장갑이었다가 숟가락이었다가 어린애 구두였다가 코 푼 휴지였다가 결국,떨어진 꽃잎이었다 더 오랫동안 보이는 대로 보았더니 키가 작고 비녀를 꽂은 할머니가 있었다 흰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오신 할머니

 

 어린 버드나무를 데리고 놀아주는 물가의 바람처럼 할머니는 나를 살살 깨웠다 손수건에 싸인 인절미 몇개와 곶감을 먹었다 할머니는 윗목에 앉아 가파른 산처럼 무릎을 세우고 잠결에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먹고 빈보자기를 치우는데, 할머니에게서 성냥 냄새가 났다 꽃의 개화와 낙화 사이를 오가는 아주 작은 나무 불꽃

-시집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에서

 

 


 

김생 시인

1967년 전북 고창 출생. 2014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