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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혜리 시인 / 저 거울 속에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9.
최혜리 시인 / 저 거울 속에는

최혜리 시인 / 저 거울 속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을까요? 오목거울은 아이들의 놀이터, 거울을 드려다 보면 사산된 내 아이의 조막손이 꼼지락 거리고 배가 불러올 것만 같습니다 아가야 라고 말하면 생리 혈이 멈추고 불린 젖을 먹인 거울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여자 내겐 불가능이 거울이 되고 우물이 되고 매일 매일 놀이터가 되는, 오늘도 저 거울에는 아이들만 가득합니다. 9시 뉴스에서 아이를 유괴한 불임녀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유치장에 갇힌 그녀는

 

 새가 되었습니다. 멍든 가슴을 조이다 새가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 나도 여자야 라고 말하면 이 가슴은 감옥이 됩니다. 꿈에서도 녹슨 젖꼭지를 꺼내 아이 입에 물리는 당신 혹, 당신이 내 아기인가요?

 

 


 

 

최혜리 시인 / 친구야

 

 

 가끔 새가 와서 울어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아주 조심스러워 보이는 자작나무는 헤어지기 전에 꼭 한 번쯤 크게 소음을 내거든 단단히 감춰진 마음이 소란스러우면 팔을 크게 벌려 잎을 바람에 막 날리는 거야 나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놀라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지 안녕?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친구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와 있지, 저녁 산책길에 가끔 고니를 만나 고니는 나의 바지를 잡기도 손을 잡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오늘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더군 그리고 낮에 다슬기도 만났어 깊은 물 속이 무서워서 너도 알지만 난 수영을 못하거든, 다슬기는 헤엄도 못 치면서 물속에 잘만 살더군. 안녕? 다슬씨 안녕? 하고 인사했는데 대답 없이 물속으로 쏙 들어가는 거야 한참을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했지

 

 가끔은 새가 와서 울었어.

 

 친구야 잘 지내지?

 

 


 

 

최혜리 시인 / 늦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습니다.

담장안 어린 살구나무도 열매를 키우겠지요.

산과 들에 나무들은 더 푸르러지고 훨훨 타오르는 저 연산홍의 붉은 열기도

봄내내 손을 뻗어 허공을 간지럽혔던 느티나무도 새들을 불러오겠지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란 고라니가 녹음의 푸르름 속에 몸을 숨기네요

늦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늦봄, 푸른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 얼마나 신기했 는지요.

우리는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봄의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서 긴 잠을 자던 씨앗이 깨어나 꼬물거리며 작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작은 손을잡았을 때, 천만년 동안 쌓였던 빙하가 녹는 듯 눈물이 흘렀습니다.

입춘 무렵 지독한 코로나19로 입원까지 하였습니다

두터운 마스크도 코로나를 막지를 못했습니다

입맛을 잃은 내 몸 때문일까

아니면 아쉬운 것이 많아서 일까

저 풍경까지도 아름답게보이네요

 

늦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최혜리 시인 / 토골일기

 

 

 다슬기는 살기 위해 바위를 잡고 개구리는 물살을 이겨내며 헤엄을 칩니다. 나는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건너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구름 따라 휩쓸리기도, 장이 나빠 소화가 안 될 때 는 구불구불 강물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어느 땐 산안개가 내려와 어리둥절하기도. 맑은 날엔 뱀이 나와 개구리를 위협하고 흐린 날엔 고라니가 다가와 콩잎을 달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휴가라고 하지만 가슴이 아픈 나는 어떻게 쉬어야 할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문을 닫고 나는 잔기침을 하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토골의 저녁을 별을 봅니다.

 

 


 

 

최혜리 시인 / 올해 유난히 비가 많이 왔습니다

 

 

너무 많은 눈물을 삼켜버린

탁자가 한쪽 다리를 들고 있습니다

폭우 쏟아져 길이 없어진 흙더미 옆에

깨진 꽃병이 그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호박잎을 덮고 낮잠 자던

벌들이 놀라 달려왔습니다

지팡이가 어눌한 걸음걸이 어르신을 간신히 떠받침니다

집 한 채도 없이 연한 맨몸으로

호두나무 잎 뒤에 겨우 몸을 피한 채

울고 있는 민달팽이를 봅니다

쏟아지는 비에 잠겨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슬픔들

천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구름

언제 터질지 모를 물을 가득 담고 흐르는 계곡

목뒤에 물주머니라도 차고 있는지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천 번쯤 목이메이고 천 번쯤 이를 악물어

신열이 몸 안에서 끓고 있습니다

세상에 슬픈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물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유난히 비가 많이 왔습니다

 

 


 

 

최혜리 시인 / 파도치는 방

 

 

방을 밀며 나는 바다로 간다

 

고래처럼 바다 속을 잘도 헤엄치던 아버지

 

방만 보면 흥분한다

 

얘야, 저 방이 파도를 치는구나

 

우리 이사 가자

 

아버지, 우리 오늘 이사왔어요 아직

 

이삿짐도 다 정리 못한걸요

 

그래도 파도가 없는 방은 재미가 없구나

 

방속에 있던 이삿짐들이 하나둘 떠올라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떠도는 짐들

 

비틀거리는 방

 

날아가는 방

 

파도치는 방

 

우주 끝 무적소리가방으로 떠다녀요

 

바닷속에서 고양이가 리본을 흔들어요

 

그런데 고양이는 알까요

 

바람 없는 방이 왜 자꾸 흔들리는지

 

아버지, 그래도 가끔은 절 꺼내주세요

 

파도치는 방은 재미없어요.

 

 


 

 

최혜리 시인 / 구순의 어머니는 오늘도 시를 씁니다

 

 

 매일 밤이 오고 어머니는 베개를 안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베개는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어머니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어머니는 뽀얀 속살입니다. 목욕탕 수증기 속에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씻기고 기저귀를 채워야 해요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립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이 수증기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 톱으로 감자를 캐며 남편을 키웠지요. 어머니는 저를 보고 엄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 엄마 아니고 에미에요 말씀드리면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습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 나오는 오후입니다. 로션을 발라드리고 홍시를 드려요. 빨간 홍시를 드시는 입은 섬이었다가 겨울이다가 코 잠속으로 빠져듭니다 시 한 편을 오래 바라봅니다 매일 달라지는 어머니를 지인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해맑은 미소를 알 리 없으니까요. TV에서 농담을 던졌습니다.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어머니는 오늘도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쉿, 알고도 모르는 척 TV 속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도 같은 시를 씁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저에게 선물합니다. 풍성한 스무 살의 기억들이 구순의 어머니 원 안에 있습니다.

 

 


 

최혜리 시인

1959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07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불교문예》《격월간 유심》 등 작품 활동. 《경남현대불교문인협회》《시와 늪》 회원. 시집 『아직도 부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