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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선 시인 / 둥구나무 아버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9.
이혜선 시인 / 둥구나무 아버지

이혜선 시인 / 둥구나무 아버지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 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KBS 제1 TV ‘아침마당’에 낭송된 시 (1999. 5. 3.)

 

-시집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에서

 

 


 

 

이혜선 시인 / 새우젓사랑

 

​소금물 속에 녹아

살과 뼈 다 내주고

까만 눈만 뜨고 기다리는 새우

새우몸을 받아 안아

제 살과 뼈 함께 녹여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소금

둘이 무르녹아 사라진 뒤에

태어나는 둥근 항아리 하나

 

 


 

 

이혜선 시인 / 동그라미가 되고 싶다

꽃과 사랑을 나누는

참 좋은 봄비가 되고 싶다

말 없는 지렁이와 굼벵이의

눈짓을 알아듣는

길이 되고 싶다

가랑잎 바스라진 몸

몸으로 덮어주는

첫서리가 되고 싶다

강물심장에 내려

하나 되어 퍼져나가는

눈송이가 되고 싶다

동그라미가 되고 싶다

 

 


 

 

이혜선 시인 / 수유꽃그늘 아래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자락

다소곳 엎드려 있는

산수유마을

흐르는 물소리 따라

수유에 피었다 지는

연노랑 꽃그늘 아래

너와 나 눈 맞추었을 때

하늘에 별

땅에는 별꽃

어울려 환히 웃고

몇 겁劫 후의 햇빛이 내려와

머리칼 쓰다듬고.

 

 


 

 

이혜선 시인 / 운문호일雲門好日, 풍경소리

 

 

살을 벗은 물고기가

 

내장도 다 벗은 물고기가

 

밤마다 가시멍석 위 맨발로 노래한다

 

퍼렇게 멍든 이끼가슴 남몰래 잉걸불로 꽃피운다

 

재만 남은 맨발에서 새잎이 돋아난다

 

하늘강물 걷는 알몸 그 사내, 잉걸불 노랫소리 탄다

 

 


 

 

이혜선 시인 / 지리산 나리꽃

 

 

지리산지킴이 할머니

 

“산을 다 지고 다녀서 내 허리가 이리 굽은 게비여”

 

하늘 땅 사이 점박이꽃 한 송이

 

쑥국새 울음 속 들여다보며 웃는다

 

 


 

 

이혜선 시인 / 수로부인, 독거미 성운星雲*

 

 

무수한 별들 속에 도사린 거미의 독침

 

한 천년 깊이 잠든

 

내 세포를 깨우네

 

너의 블랙홀에 빠져버린 붉은 심장,

 

80만개 원시별로 나를 유혹하는 은하계 진달래 분홍피톨

 

바닷속 용왕의 사랑피톨

 

내 피 속 하이드씨가 사랑하는 수로부인, 독거미성운

 

*독거미 성운: 지구로부터 16만 5천 광년 떨어져 있는 타란툴라성운, 거미같이 생겨서 독거미 성운이라 불리며 80만개 원시별이 담겨 있다고 함.

 

 


 

이혜선(李惠仙) 시인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1981년 월간 『시문학』 천료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문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시집 『神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 『새소리 택배』. 평론집 『문학과 꿈의 변용』 『이혜선의 명시산책』.  한국 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평론부문), 선사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동국대 외래 교수, 세종대 강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 현재 동국문학인회 회장. 한국 문인협회와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