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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월 시인 / 연기의 시간
늙은 노부 목숨 앗고 자식마저 떠난 폐가 숯검정 나뒹굴 듯 불꽃 그리 사라졌다 연기는 산자들 기호 헛헛한 속 달래는
부도난 은발 K씨 줄담배 연신 피워댄다 경계 없는 삶의 부침浮沈 뭉게뭉게 피어나고 자욱한 구름의 변주 집안 가득 맴돈다
예전엔 몰랐었다 철록어미 울 아버지 애간장 녹아내린 아픈 시간 계보란 걸 이 빠진 낡은 재떨이에 한 가계가 절여 있다
-시집 <나무와 사람>에서
류미월 시인 / 봄 공작소
자전거 장바구니에 삐죽 나온 대파처럼 시큼하게 퍼져가는 레드와인 향기처럼 살며시 찾아온 봄이 영사기를 돌린다
빛바랜 교가 악보 바람이 와서 넘기고 아이는 하나 없이 어른만 노는 운동장 멈춰선 발걸음 앞에 옛날이 걸어온다
꽃 피고 새가 울고 느릿느릿 흐르는 구름 고장 난 시계가 눈물나게 고마운 날 아찔한 한낮의 판타지, 내 유년이 재생된다
-《정형시학》2023. 여름호
류미월 시인 / 꽃들은 그 많은 슬픔을 기억하고
노인정 지나칠 때 흘러나온 노랫소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때마침 만개한 진달래 어제를 돌아본다
남편 먼저 보내고 자식들도 발길 뜸한 영자씨 낙이라곤 오가며 보는 꽃들 황 · 백 · 홍색을 뽐내며 앞을 다퉈 피어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꽃이 저리 피는 이유 눈물샘 구멍을 막다 히죽이죽 터지듯 홀로 된 슬픔의 봄을 꽃이불로 덮어주려
-《성파시조문학》2023. 창간호
류미월 시인 / 신도에서
외딴 섬 교실 두 칸 자물쇠가 걸려 있다
아이들 재잘거림 썰을 따라 몰려간 뒤
개망초 하얀 꽃들만 화단 가득 피어 있다
응달진 처마 밑에 참선하듯 매달린 종
스스로 울지 못해 바람에 몸을 맡기면
알알이 터지는 그리움 파도소리로 울린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이면에 딸린 섬.
류미월 시인 / 된바람, 꽃을 물다
장산곶 굽어보는 백령도에 서린 안개 통증 앓는 바다허리 수심愁心 점점 깊어지고 철없는 물고기 떼만 경계 없이 넘나든다
빈 하늘 갈매기 떼 어린진魚鱗陳 필법인데 비수 서로 겨눈 채 거센 파도 일렁일까 NLL 걸린 속내만 거품 물고 보글댄다
꼭 조인 허리띠가 느슨하게 풀어낼 쯤 어선 한쪽 부푼 소식 달빛 아래 바람 타고 난바다 뚫고 피는 꽃, 무궁화꽃 번지는가?
류미월 시인 / 한치
제주도 탑동 해변 어느 횟집 수족관에 곁눈질 한치 무리 허공을 염탐한다
이번 생 날고 말 거야, 한 치 앞도 못 보고
석양빛에 투명해진 날렵한 선형 몸매 지느러미 펄럭!하자 하늘도 출렁!한다
생과 사 마음의 거리가 한 치인 줄도 모르고
류미월 시인 / 구절초
마른 풀 짙은 향기 무덤가에 번져난다 먼 하늘로 솟구치는 구구절절 전언인가 쓰디쓴 사랑을 잃은 저문 날의 하얀 편지
땡볕에도 서늘한 땅,당신은 여기 없고 꽃잎으로 뭉쳐나는 얼룩진 눈물 자국 바람의 손짓을 따라 허공을 젓는 필체
헛헛한 가슴속에 차오르는 목마름인 듯 아홉 개 절간에서 울려나는 종소린 듯 귀울림 그 이름 하나, 가을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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