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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시인 / 조용한 가족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앉아 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이동호 시인 / 수화
그는 나무다. 상록수다. 그의 입은 가지이고 그의 언어는 푸른 잎이다. 그가 나이테에 가둔 말을 풀어낸다. 그는 가지 가득 말을 올려놓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잎사귀를 이해하려 애써보지만 푸른 빛이 시끄러울 뿐이다. 대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잎을 오물거린다. 잎이 점점 深綠色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증거. 그가 역방향으로 자신의 가지를 흔든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멀어져서 곁눈질이다 사람들도 나무다. 단풍나무다. 방언이 깊어 사람들은 늘 가을이다. 불필요한 상징을 없애고 나면 늘 그와의 앙상한 거리를 드러낸다. 그와 사람들이 일정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서로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삶이다. 그러나 그는 아픈 나무다. 자신의 말에 늘 찔리는 상록 침엽수다. 오늘도 대문 밖에서 그가 푸른 잎을 떨군다.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도 귀를 막는다
-현대시학] 2004년 / 2월호
이동호 시인 / 어머니와 아들
부엌에서 어머니 수돗물이 되어 흐른다 설거지를 하는지 거품처럼 톡톡 켜졌다가 터지는 울음소리를 튼다 한 평생 궂은 일로 맥빠진 눈두덩에 몇 방울의 미지근한 물밑 온도를 맞춘다 어머니의 손은 늘 젖어있었다 며느리라도 얻을까하여 늙은 아들 잔주름에 기름진 밭 갈던 눈동자 속 오늘따라 수돗물 소리 괄괄 흐르고 아들은 아들대로 골방에 들어앉아 고장난 보일러 소리를 낸다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에서 수두자국을 끌어다 밥 짓는다 아들은 구들장 아래 가는 목 드리우고 얼굴의 곰보 구멍 속 불편한 심기를 부글부글 끓이고 있다 밥을 짓다 어머니 밥솥이 되었다 속을 하얗게 익혔다 잘 익어 모락모락 눈물이 오르는 쌀알 같은 가슴을 퍼다 공기에 담고 아들의 운명 속에 들어앉길 원한다 아들이 웃는다 웃음 속에 밥알이 떠내려간다 뽀얀 밥알 속으로 잇몸 스며든다 어머니 웃는다 배수구를 빠져나가는 오수처럼
이동호 시인 / 옹당이
변소에 앉아 똥을 한 무더기 내려놓으며 앞산을 바라보면, 앞 산 또한 하느님의 똥 무더기는 아닐까 상상하며 푸식푸식 웃던 때 생각난다 고얀 놈 하늘이 한쪽 눈을 찡그리고 내려다보는 모습 두려워 고개 살짝 돌리면 감나무가 이치를 깨달은 듯 나뭇가지마다 켜놓고 있던 붉은 동그라미들 감나무 아래 고인 옹당이가 정안수 같아 쪼그려 앉은 자세로 소원을 빌었었다 소원을 들어줄 것처럼 옹당이 속으로 무수히 뛰어내리던 별빛들, 보며 나도 자라 옹당이가 되어야지 무조건 받아내는 포용력을 배워야지 하다가 혹 저 옹당이가 소우주는 아닐까 우주 또한 작은 옹당이에서 발원한 더 큰 물웅덩이일 것만 같았다 나는 무슨 진리나 깨우친 수도승처럼 볼일 보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터진 홍시라도 되는 듯 내 몸을 빠져나간 똥 무더기에서 폴폴 단내가 난다 볼일을 끝내고 마당에 고이면 내 몸 속으로 뛰어 내리던 숱한 별빛들 나도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옹당이였을까 내 속에 우주가 넘칠 듯 고여 있었다 서쪽 산으로 잘 익은 홍시 하나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여명이 구수하게 풍겨올 것만 같았다
* 옹당이 - 빗물 등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물웅덩이.
이동호 시인 / 레미콘 트럭
아버지는 신이셨다 트럭에 지구를 올려놓고 자주 출타 중이셨다. 지구는 짐칸에서 저 홀로 빙빙 돌아가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저녁 무렵에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작업복은 은하수에 젖어 반짝이고, 뉴스에서 열대야가 자주 거론될 때에는, 북극의 빙하를 까만 비닐 봉지에 가득 담아오기도 하셨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우리 머리를 아버지의 손바닥이 쓰다듬을 때마다 후두둑 우리의 발등으로 별들이 떨어지곤 했다.
우리는 자갈이거나 모래였다. 아버지는 몇 포대의 시멘트와 물만으로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셨다. 형은 한 가정의 든든한 바닥이 되었고, 나는 단단한 기둥으로 자랐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지구를 물려주시고 산 속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마음에 신전을 세웠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다스렸다.
두어 개의 쇠못과, 나사못 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하곤할 때에는, 가끔, 손바닥으로 다큰 우리 등을 쾅쾅 두드려주신 것처럼 하늘에는 천둥이 치고 후두둑 빗방울이 우리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를 구부렸다 펴곤 했다.
아이들도 이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그런 날에는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 자식들에게 신화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태초에 아버지의 트럭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멘트로 이 세상을 지으셨다. 그 속에서 우리들을 살게 하셨다
세상 밖에는 아버지의 트럭이 정차해 있고, 지구는 그 트럭 위에서 여전히 빙빙 돌고 있다.
이동호 시인 / 총잡이
며칠째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총만 종일 만지작거린다 몸속에 총알이 가득 찰 때마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내가 타고난 총잡이이기 때문이다 난사亂射는 하수나 하는 짓이다 나는 화장실 변기통을 향해 권총을 정조준한다 총알에 맞은 물들이 튀어 올랐다가 축 늘어진다 죽은 물은 관을 타고 정화조에 가 묻힌다 정화조는 죽은 물들의 공동묘지이다 며칠째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속상했다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으면 좋겠다 나는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강도를 응원하며, 그가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신에게 빌 것이다 나나 당신이나 시건장치를 풀 용기가 없는 자이다 사타구니에 총을 차고 수시로 은행 문을 드나들겠지만, 총을 한번 폼 나게 제대로 빼어든 적 있는가 텅 빈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며 총알이 박힌 듯 아프게 은행 문을 돌아서 나왔던 불쌍한 당신이나 나나, 축 늘어진 총구를 세워 달마다 여자 몸속의 둥근 표적을 향해 무수히 연습 사격을 한들, 총알 낭비 아니겠는가
이동호 시인 / 애플 주스
부산행 무궁화호 4호차 8번 좌석에 앉아 7번 좌석의 그녀를 빨고싶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의자에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평소 풍만한 가슴을 좋아했으므로 그녀의 잠든 몸에 빨대를 꽂고 싶었지만 그녀의 애인이 아니어서 혼자 안타까워져갈 무렵이었다 기차는 수원역을 지나고 조치원을 지나고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들이 세상의 아랫도리에 뿌리를 꽂고 쪽쪽 빗물을 부끄럽게 빨아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전이 기차를 멈추어 세웠을 때 그녀가 짐을 챙겼다 그녀가 내 생각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시선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한번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기에 내 속에서는 그녀가 넘칠 듯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벗어나 역사 앞에서 지금 누군가와 키스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질투가 단맛처럼 돋았다 그러나 신맛이 약간 도는 나의 아 사과 맛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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