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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원 시인 / 화투 치신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8.
조원 시인 / 화투 치신다

조원 시인 / 화투 치신다

 

 

아침 밥상을 물리고 심심해진 두 모녀

할머니는 벽에 기대 어긋난 틀니를 딸깍이고

어머니는 국화, 매화, 난초, 단풍

입소리 내어 화투 패 맞추신다

보청기에서 파리 끓는 소리 난다

철 수세미로 내장을 씻는 것 같다 하시더니

묵은 말씀 아프지도 않고 술술 나온다

둘째딸 죽어 묻을 적에

울다가 코피 터진 말씀부터

할아버지 묻고, 못 먹어서 굶어죽은

큰 아들까지 묻고 나면

흘깃흘깃 늙은 딸의 훈수를 기다린다

씨앗 한 톨 자라지 않는 레퍼토리

어머니는 비광이다 똥광이다

우스갯소리 샛길로 빠지려 하고

바람난 할아버지 바짓가랑이 찢듯

짝 지어둔 화투 패 흩치는 할머니

떨어진 팔광 보름달이

은빛 동전으로 보이는지

엄지 검지 갈고리 세워 화투 패 후벼판다

어머니는 슬그머니 동전을 꺼내

보름달 위에 얹어 주신다

 

 


 

 

조원 시인 / 물방울

 

 

타르페이아*같은 절벽을 내려다본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닌 당신의 뜻

배수구로 가는 길은 멀고 세면대는 그렁하다

서로를 포개지 않으면 우리는 곧 증발하고 말겠지

누군가 다시 운명의 꼭지를 비틀어 준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류로 뛰어들겠다

저, 구멍이 바다로 가는 입구라는 걸

목숨 간당거려본 자는 알고 있으므로

 

햇살이 내 몸을 관통한다

나는 이제 초 단위로 말라가고 있다

그림자를 찍지 못한 새들이 하늘을 날고

휘파람을 잃은 입술 하나가

오늘은 아주 밍밍하게 죽을 것 같다

히말라야 설산의 눈 조각도

자신을 녹이는 데 평생이 걸린다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하겠지

나의 과오는 재빨리 본류에 합류하지 못한 것

물의 욕망, 물의 안락, 마조여신**은 어디 있는가

구르기만 하다 증발할지도 모를

나의 기록에도 물살이 불었으면 한다.

 

*타르페이아 :카피톨리네 언덕 남서쪽에 솟아 있는 살인자와 배반자들을 내던지는 절벽 바위

**마조女馬祖mäzû 여신은 '천후낭낭天后娘娘'이라고도 부르며,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제해 주는 여신이다

 

-<다시올문학> 2010. 가을호.

 

 


 

 

조원 시인 / 시루 속 콩나물

 

 

낡은 영혼만 수감하는 곳을 아시나요

사방은 벽뿐이고 검은 모자를 눌러 쓴 이들

이곳엔 독방이라곤 없지요 혼자 명상하게 두거나

고독만큼 자유로운 건 없으니까

빵이나 곡물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물만으로 포만감을 가지는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하늘만 응시했고

빗방을 풀어 어린 새를 훨훨 날려 보냈어요

병뚜껑마저 문장으로 탈바꿈시킨 당신은

세상에 의문부호만 가득 찍어댔지요 술 아닌 건 맹물이라고

비틀거리는 공룡 뱃속을 아직도 상상하고 있군요

낙타에게 키스를 퍼붓던 기억은 제발 뇌리에서 삭제시켜요

벽을 통과하는 일이 유죄라는 사실 모르나요

달의 그림자를 태양이라 떠벌리기 시작하더니

아침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묘

구름 위로 이주신청까지 해 놓은 나무들

바람은 노인의 지팡이마냥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바다를 침실로 사용하려는 당신

잡초 무성한 묘지로 탈출하려는 당신

평생을 외발로 사는 벌이 무섭지도 않은가요, 마치 인어처럼

다리의 비늘만 보고 있군요, 이젠 잠수를 하시고 싶다?

전류를 퍼 나르며 촉수 곤두세우는 전봇대가 보이지도 않나묘

 

언제 영혼이 뽑혀나갈지 모를 당신

계속 그렇게 아삭거리기만 하실 건가요?

 

 


 

 

조원 시인 / 슬픈 레미콘

 

 어쩌면 이 타원의 항아리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태어나서 항아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풍랑에 꼬리가 휘감긴 외로운 고래 같다. 몸통 가득 시멘트를 채우고 마지막 남은 십 프로 눈물을 간간이 뒤섞으며 짐승의 몸을 이어가는 고래. 얼마를 돌려야 저 거대한 항아리가 깨어지나. 바람도 아닌 것이, 구름도 아닌 것이 서커스단 낮은 단상에서 끊임없이 유영한다.

 

 때로 유기체들이 직선의 꼭짓점을 만들기도 하지. 허공에 정착하려면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기술부터 습득해야 한다. 모래 속에 감춰진 눈물이 뻑뻑한 고체로 자랄 수 있게 위태한 모션 안에서 수평을 잡는다. 애초 불안(不安)과 부동(浮動)이 한 몸인 것처럼 소년의 회전 방식도 어느 한 지점에 멈출 것이다. 사물과 사물의 결합재로 시공될 푸른 아킬레스건, 타원의 결함을 직사각이 보완하듯 소년은 자라면서 한장의 벽돌로 압축된다.

 

 


 

 

조원 시인 / 기타가 버려진 골목

 

 

진눈깨비 내리는 골목

깡마른 철문 아래 그녀, 덩그러니 앉았다

 

울림구멍 휘돌아

환하게 퍼지던 목소리

어디에서 끊어졌나, 생의 테두리가 뭉개진 듯

귓가는 물먹은 판자처럼 먹먹하고

어느새 얼굴에도 나뭇결이 깊다

 

기억 속 줄감개를 조여 허공을 탄주하던 바람과

헌 옷가지에 비닐을 덧댄 창문으로

종종거리며 달려오는 진눈깨비, 저 허깨비들

공명으로 잡지 못한 시간을 새하얗게 덮고 있다

 

텅 빈 젖무덤 자리

적빈의 쥐꼬리만 드나들고

 

 


 

 

조원 시인 / 프로타쥬*

 

 

내 얼굴에 트레이싱 페이퍼를 올려요

보이는 것들은 쉽게 카피 되죠

4B연필로 표정의 요철들 오래도록 문질러요

선명한 것 모두 뭉개고 편편할 때까지 계속 문질러요

탐색하고 베껴먹은 얼굴은 구린내가 나요

나는 최대한 밋밋해지고 싶어요

날갯짓만으로 새의 언어를 요약할 수 없듯

콧노래만으로 말<馬>의 기분을 재단할 순 없죠

뿌리 속에 숨어 사는 꽃봉오리

시체 속에 자라는 아름다운 벌레

내가 남몰래 얼굴을 썩히고 있는 건

눈물이 가장 편편할 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밤의 불빛이 수천 마리 날파릴 비추는 건

한 마리 버둥거림을 보기 위해서죠

바다가 첩첩 절벽까지 몸을 끌고 와

그토록 세차게 부딪치는 건

한 점 물방울을 만나기 위해서죠

흑연<黑鉛>에 휘갈긴 세월 속으로

암각화처럼 패인 굴곡들이

아무것도 아닌 그림일 때까지

당신 떠난 출구는 모조리 막아버릴래요

 

*프로타쥬: 나뭇잎, 나뭇결, 철망 같은 울퉁불퉁한 면 위에 종이를 덮고 부드러운 연필이나 콩테, 크레파스 등으로 위에서 문질러서 모양을 나타 내는 기법

 

 


 

 

조원 시인 / 붉은 울타리

 

 

그대는 매우 자극적인 입술을 가졌다

밤낮으로 열렬히 꽃 피운다 나의 발목 위로

 

가시와 넝쿨을 흘려보낸다

 

내가 내 몸의 함성을 줄이고

눈알이 찔려 사지가 묶일 때까지

날개가 날개의 역할을 버리고 부동이 될 때까지

 

몽롱해진 눈동자 위로

단색의 혈을 들이붓는 그대

 

꽃병도 아닌 내게 붉은 봉오리를 담으려 한다

솜털도 아닌 내게 가시로 깊이 찌르려 한다

 

내 슬픔과 무관하게 봄이 온 것이다

 

그대 발언에 두 볼이 상기되고

꽃을 강요하는 가시에 심장이 찔렸다

 

나는 생명력을 흡수당한 사람. 두 손이 묶인 채

그대 몫의 혈류를 찬양해야 하는 새

 

맹목적인 붉음이 싫습니다

지능적으로 찌르는 가시가 증오스러워요

 

가만히 있으라는 꽃의 명령

저항 없이 쓰러진 울음의 시체

 

목울대에서 시뻘건 저녁이 올라온다

 

나는 왜 처절한 숲에 묶여 있나

어떤 자세로 꽃의 횡포를 겪고 있나

 

무력이 판을 치는 영화에도

이런 참혹한 엑스트라는 없을 것이다

 

장미는 변이된 하이에나의 심장

물어뜯긴 갈비뼈 하나가 나를 대변할 뿐인

이 잔인한 꽃밭

 

 


 

조원 시인

1968년 경남 창녕 출생. 동의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픈 레미콘』. 현재 <잡어>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