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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남 시인 / 멈춘다는 것
빨간 신호에 따라서 걸음을 멈춘다
멈추는 동안 시간이 굴러가는 것을 본다
시간은 저울처럼 공평한 것
때론 신호등처럼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을 멈추고 고요에 깃들일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
멈춤은 모든 걸 키워내며 너그럽게 공경하는 따뜻한 마음씨앗 마음 안의 시詩이지 않을까
유통기한이 없는 매일의 페이지에 은유를 길어 올리는 소담한 맛의 기도 향기는,서로 존재하므로 가능하지요
이승남 시인 / 반성
회칠한 듯 숨 막히는 허공 속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
어쩌나… 어스름 해 걸음이 고목처럼 버티다 온전하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다
세상에나 이렇게 엉망인 환경에 직면하다니 흔들리는 지구를 달 뒷면으로 가두고 천천히 초콜릿을 먹어야하나 목 캔디를 먹어야하나 심각한 고민인데 비에 젖어 표류하는 안개 몽환 속에 비비적거리고
채마밭 언저리에 온몸으로 바닥을 스캔하며 뼈 없이 거치른 한 생을 살아내는 민달팽이 떼 저들의 오체투지를 삭제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생각의 꼬리는 너무 길어 삭아가는 고무줄처럼 곧 끊어질 것 같은데
달빛 고른 밤 유년의 뜨락에서 보던 하늘이 하도 고와서 눈이 시리던 그 날 그, 고아한 지난날들이 가슴 먹먹하도록 그리운 건 다시 깨끗한 심장을 가져 보고 싶은 떨림 그리고, 우린 안녕해요 라고 인사하고 싶은 거
이승남 시인 /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가다 살아나는 것 살아나다 죽어가는 것 모두가 하나의 실체인 것
액자 같은 테두리에 갇혀 온전히 내어 주고 틀 안에서 부화되어 나비가 되는 것
세상이 숲처럼 디자인되길 바라는 건 나만의 추상일까 썩은 사과의 흠결을 싹둑 잘라내고 완전한 사과를 먹어야 하는 거 그건 너무 고독하지 않은가
꿈틀꿈틀 살아내는 길 자아로 오르는 지름1밀리미터의 시작점이어도 매일 신선하게 출발할 것이다
이승남 시인 / 사는 맛
눈발이 그치고 거리로 나섰다 경사진 아스팔트길 깨진 모서리에 노란 민들레가 계절을 잊은 채 다소곳 피어있다
스치기만 하여도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날카로운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노란 꽃잎 온전한 마음을 심는 자리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나 보다
순수한 바람이 분다 마셔보면 알싸하고 상큼한 맛 자꾸만 그 순수함에 이끌려 길을 걷는다 발걸음을 멈추고 동백나무에 등을 기댈 때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볕은 마치 유년시절 동무와 술래놀이와 같구나
붉은 놀이 서녘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마법에 홀린 듯 하루가 지나는 길목에 초록지붕 오 요안나 할매 집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부엌문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음,둥근 뚝배기에 배춧잎이랑 얇게 저민 두부 대파 송송 보글보글 끓고 있나보다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맛일 게다
맛의 길을 따라 걷고 걷다보니 어둠이 묵묵히 내려앉는데 문득 구름등을 타고 저기 고비高飛로 가야하는 길을 생각한다
구수하고 튼튼한 맛의 길을 찾으러.
이승남 시인 / 그의 힘으로 사는 것
푸른 언덕위로 불끈 솟아오르는 찬란한 빛 우리네 오가는 길목으로 제 마음 다 부려주고 오직 침묵으로 다가와 주는 뜨거운 힘 천년이 흘러도 그곳 그 자리에 지상의 모든 것들을 지켜내는 정렬의 힘
가끔 시커먼 먹구름이 세상을 가려도 묵묵히 그리고 따스히 얼굴을 드러내는 인자한 힘
그의 힘이 있어 살아가는 생명들 그의 힘이 주관하기에 우린 사는 것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는 그저 작은 겨자씨 그의 빛으로 싹트고 살아낼 때
세상을 멋들어지게 안아주고 커다란 웃음 한 보따리 품은 온정 다 쏟아 주곤 천천히 고요히 붉은 잠속으로 들지만 그 우직한 힘은 내일도 모레도 영원할 것이며
간혹 울컥 가슴에 샘을 파는 날이어도 새 아침 웅크린 안개 속을 넘어 빈칸으로 그의 환한 빛이 비추이면 고요 속에서 심장이 쿵,쿵 뛸 것이다
이승남 시인 / 텃밭
푸석한 흙들로 가득했던 작은 텃밭 귀퉁이엔 겨울에 심은 상추가 파랗게 자라주어 봄날 식탁이 풍성하고 남은 공간은 오이며 야채를 심어 바람 볕 물을 버무려 뿌려 주니 파릇한 은율들이 돋아나네
고단한 일상에 상큼한 맛을 양푼에 담아 다글다글 끓는 된장찌개를 곁들여 한 입 먹으면 소멸 되어가던 쉼표가 놓이고 텃밭으로 삶의 오감이 밥상위에 가득하네
아직 가꾸어야 할 자투리 텃밭 소소하고 심심찮은 벗이 되어 가리니 볕 좋고 스치는 바람이 달달한 오후13시30분 해바라기 꽃술에 앉은 벌과 나비도 고요하다
이승남 시인 / 지금이 좋다 물살이 유유히 흐르는 오후 맨발의 청춘들 다정히 걷고 송림 안 가득 가을이 머물러 앉으니 향기 나는 이야기 오순도순 무르익어 갈 때 익혀지는 시간에 이끌려 자꾸만 맴돌던 생각 분명 어린이였었는데 이렇게 익어갈 줄은 몰랐지 가슴이 가을 산처럼 발갛게 활활 물들며 타오른다 강변 옆 재첩국집 인정 있게 내놓는 뜨끈한 애호박전 달콤 짭짜름 맛 한 입 먹을 즈음 오늘 잡았다는 재첩국 한 상 내놓는다 오돌오돌 씹히는 재첩이 제맛이라 부추 잎 둥둥 띄워 초록이 물들어 더 한 그 맛이 일품이라 가을을 송두리째 먹는 이 맛에 타던 가슴이 이내 가라앉는다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다시 맨발의 청춘으로 강변 숲을 찾으리라 보시니 참 좋았다는 진리를 알게 해준 말씀 따라 좋은 생각만 한아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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