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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 / 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김소연 시인 / 가장자리
바로 오늘이야
라고 읊조리며 가느다란 눈매로 먼 데를 한참 보았을 사무라이의 표정을 떠올려 본다
수평선이 눈앞에 있고 여기까지 왔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 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 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준비해 간 말들은 입술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되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머리통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의 가장자리가 젖어갔을 때
눈앞에 있는 냅킨을 접었다 접고 다시 접었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대고 또 접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서 있는 걸까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처럼 번지고 있다 빛이 퍼지는 각도로 비둘기가 날고 있다 검은 연인이 그늘 속에서 어깨를 기대고 낮잠을 잔다
여긴 어디에요? 공손하게 질문을 던진다
바디랭귀지를 하니 춤을 추는 기분이 든다 다 왔구나 싶어진다 여기가 어디든 간에
김소연 시인 / 돌이 말할 때까지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김소연 시인 / 과수원
사과를 연구하는 자는 사과의 미래를 굳게 믿는다 사과의 가능성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걸 무지로 파악한다 사과를 너무 많이 들어서 사과를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아무래도 사과의 허구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해의 허구도 사과해야 할 것 같다 사과를 구하면서 사과로부터 하염없이 하염없이 멀어져가는 사람들 화가의 정물로 사랑받아온 사과들 건강미 넘치는 사내들의 앞니 자국이 찍힌 사과들 트럭을 타고 달리는 사과 더미들 우당탕탕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새빨간 사과들 사과가 하나둘씩 멈추면 허리를 굽혀 멍든 사과를 주워드는 사람들 사과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니 벌써 용서받은 것 같다 용서의 허구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소연 시인 /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젖가슴에는 젖꼭지 대신 꽃봉오리 발가락에는 발톱 대신 자갈들이
이럴 때는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이럴 때는 딱 한 잔, 딱 두 잔, 딱 넉 잔 이럴 때는 달빛에 녹아내리는 벚꽃 잎처럼 흩날려 사라지면 안 되나요
퐁짝퐁짝 풍짝짝 사람들이 춤을 덩실덩실 출 때에 그 앞에서 음악이 되어 사라지면 안 되나요
목덜미에는 입술 허리에는 두 팔 머리카락에는 태엽 풀린 인형들 등 뒤에는 매미처럼 당신이
김소연 시인 / 너를 이루는 말들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 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는 나무 밑동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고 하자 동면에서 깨어난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김소연 시인 / 생꼬르발에 대하여
아침엔 늦게까지 잠을 잘 것. 어제가 충분하게 멀리 떠나가도록. 우선 보드라운 양말에 발을 넣어야지. 그리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다. 옥상에 올라간다. 머그잔을 들고서.
다세대주택들이 반듯하게 도열한 것을 내려다본다. 호호 불며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더 멀어지는 걸 보고. 머그잔에서는 아직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우유 냄새가 올라오고.
양말을 신길 잘했다.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말하는 친구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응한다.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우는 입이 일그러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후원자의 명단이 끝없이 나열될 때. 팝콘이 되지 못한 옥수수 알갱이가 몇 알 담긴. 커다랗고 텅 빈 종이컵을 옆구리에 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걸어가야지. 나라면 결말을 저렇게 안 했을 거 같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은 결말을 엿듣지 말아야지. 가족이 등장하지 않으면 인간의 비극은 표현 조차 되지 못한다는 게 너는 이상하지 않니. 하고 묻지 말아야지. 감독의 의도를 헤아리지 말아야지. 아웃 포커싱된 배경 속에서 태연스레 움직이던. 그 많던 차력사는 어디로 갔을까.
에 대해 연구해야지. 이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모자란다는 것에 탄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 뾰루지와 가득 찬 휴지통과 무수히 만개한 일일초를 얻을 때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날에 낯빛과 햇빛과 오후와 친구와 거의 모든 것을 얻을 때
회사를 구한 시인을 생각한다. 백봉투에 사직서를 접어 넣으며 빙그레 웃는 그 모습을. 축의 혹은 조의 봉투처럼 사직서 봉투는 편의점에서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그리고
일정을 짠다. 다시 일정을 바꾼다. 다시 일정을 취소한다.
목적에 맞게 가공된 얘기를 해야지. 간신히 거짓말만 모면해야지. 진심을 다해 진심을 감추며 누군가와 대화해야지.
바람이 부는 날에는 굴뚝과 연기가 직각이 되는 구나. 누가 그려놓은 것 같구나. 이 동네는 공장이 많긴 많구나. 그렇구나.
우유는 다 마실 것. 슬리퍼는 가지런히 벗어둘 것. 머그잔은 비린내가 나지 않게 잘 씻어서 엎어두어야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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