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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시인 / 마음 개인 날
하루가 둥글고 불룩하다 옹기 항아리 같다 내가 나로 고여 있는 하루를 온전히 들여놓았으니 구름도 어려워한다 먼 산도 기웃거리다 그냥 간다 하루를 요리조리 만져보고 두드려 보다 그냥 간다 진공(眞空) 혼자 계시다 세상 가을을 다 퍼담아도 충분하다 시간이 황톳빛이구나
-『불교신문/문태준의 詩 이야기』 2024.11.11.
이관묵 시인 / 골방
골방은 낮은 지붕 아래 있었다 할머니 침침한 석유등잔 아래 무릎을 세우고 어둠을 지피던 방이었다 낮에도 어둠이 두꺼운 그 방이 나는 좋았다 심란한 낙서들이 귀를 세우는 겨울 밤 소란한게 싫어서 나는 그 어둠 파먹으며 침묵을 학습했다. 사방이 흙벽뿐인데도 굴뚝을 향한 납작한 봉창으로 밤이면 내가 궁금하다고 달이 떴다
언제였을까 어린 마음에도 생각 짓찧고 싶을 때 있어 허공에 눈송이 꽂히는 한겨울 들판을 오려다가 종잇장 같은 마음에 걸어 놓던 뼈가 하얗게 비치던 때가 있었다
이관묵 시인 / 겨울 문병
계룡산 몇 뿌리 캐서 보내드리니 달여 드세요 고집, 이제 쉬게 하세요 마음도 내구연한이 지나 고장이 잦을 겁니다
벽에 걸려 있는 추위 몇 벌 늘 켜놓은 음악 몇 자루 몇 권의 묵묵부답 눈길 몇 켤레 홑이불 같은 일요일 검은 묵언...........
평생 소장했던 애물단지들 당분간 제게 맡기시고요 이제 밤 푹 재우세요 그놈 시 쓰느라고 혹사한 탓인지 밤이 몹시 허약해 보입니다
껴입었으나 몸에 맞지 않아 불편했던 날씨들 시 얘기 끼어들지 못해 안달했던 술잔들
고생했으니 위로해주세요
이관묵 시인 / 무향헌無香軒
겨울인데도 비가 왔습니다 밖에서 돌아와 문 걸어 잠그고 듣는 슈베르트 아르페지오 나는 오후를 내성적으로 틀어놓고 고요 쪽으로 머리를 두었습니다 이불 뒤집어쓰고 앓아누운 겨울 곁으로 빗소리를 오려 가진 비 제집 가는 길 몽땅 털린 비 오래 불 때지 않아 냉골인 마음 열어주었습니다 늦은 밤비와 독대했습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물어물어 찾아오느라 수고한 비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삶을 지껄이는 비
멀리 사시는 하루가 도착하자 부랴부랴 비는 겨울에게 사과하고… 겨울은 비를 용서하고… 비가 잠 안자고 캄캄한 밤에다 끼적거린 낙서들 시가 아닌 그냥 낙서들 문득 비에게서 시 냄새가 납니다
이관묵 시인 / 액자속의 자유
사내가 다가와 "한푼도와줍쇼" 한다 들고 간 캠핑용 매트리스만 한 일요일 꺼내 펼쳐 주었더니 금방 누워 코를 곤다 접었다 편 두 평짜리 일요일 참푹신하다
오, 푸른잠 삶 한 개비 피우다 떨어뜨린 재같은
이관묵 시인 / 저녁 강
강가에 무릎 세우고 앉아 흘러가는 강물 무연히 바라본다 사는 일이 모두 흐름에 물들다 가는 일이라고 한 여울이 다른 여울을 세차게 껴안는다 흐름의 수심 깊이 가라앉은 무겁고 느린 生이 있지 다 왔다, 다 왔다 할머니 목소리를 내는 저 여울이 그리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쓸쓸함으로 읽히는 세상을 빌려 띄엄띄엄 달맞이꽃이 피었다 지는구나 내가 끌고 다닌 길이여 어느 깊은 그늘에 이르러 미치게 뒤척이며 내 상傷한 노래와 노래 곁에서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우울한 저녁 하늘을 너는 또 어느 기억 속으로 이끄는 것이냐
이관묵 시인 / 동백 민박집
멀리 거문도까지 떠내려온 뱃길 모시고 민박했다 동백 민박집! 동백이 장기 투숙하는 집이라고 했다 며칠씩 두문불출하고 파도 소리만 지우다 간다고 했다 방 비우고 지금은 향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모시고 온 뱃길 재워놓고 동백이나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동백은 만나지 못하고 동백이 신고 다니다 내동댕이친 길바닥 신어보다가 털어보다가 그냥 거기 가지런히 벗어놓고 왔다 집 나간 동백 혼자 타달타달 걸어올 맨발이 불편하지 않도록, 발 부르트지 않도록.
늦은 밤, 말려놓은 밤바다 안주 삼아 혼자 소주잔 기울이는데 숙소를 정하지 못한 강풍이 몰려와 통유리 두드린다 빈방 있냐고, 하룻밤 묵어가겠다고. 여기는 빈방이 투숙하고 있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이미 빈방이 단체로 몰려와 시끌벅적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늙은 간판은 목이 쉬었다
빈방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된 아열대 상록수림, 밀반출금지 품목.
-시집 <동백에 투숙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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