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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9.
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들판 가로질러 온 바람이

떡갈나무 마구 흔들어 깨운다

마지막 끈 놓치기 싫어

허우적거리는 잎사귀에게

이제는 손 놓아야지

허공 맴돌며 몸부림치다가

먼저 와 있던 낙엽 더미 속에

얼굴 파묻는다

푸석한 몸뚱어리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서러워하지 않으리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길

 

바스락거리는 소리 즐기며

낙엽길 걸어가는 젊은 남녀 한 쌍

물끄러미 바라보는 노파

언젠가 다가올 그들의 모습이란 걸

바람이 넌지시 알려주고 간다

 

-계간 <詩하늘 108> (2022년 겨울호)

 

 


 

 

김임백 시인 / 강가에서

 

 

기지개 켜고 하품

늘어지게 하는 강물

비몽사몽 꿈속 헤매다 깨어보니

아지랑이 춤추고

봄 햇살 긴 입맞춤으로 반겨준다

폐인처럼 멍하게 퍼질러 앉은

머리 위로 군불 지피고 있는 태양

굽이굽이 휘돌아 나온 날들

잃어버린 길 찾아 나서야 하는데

엄두 내지 못한 채

강가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가야 할 길 가로막던 동장군

슬슬 뒤꽁무니 빼고

담방담방 뛰노는 물고기들

재롱부리고 있다

 

아, 나는 지금

사해(死海)로 갈 것인지

갈릴레아 호수로 갈 것인지

 

 


 

 

김임백 시인 / 풍선과 스트레스

 

 

몰아내고 싶은

스트레스의 부피가 커

입김을 불 때마다

부풀어 오르던 풍선

놓아 버리니

나뭇가지에 걸려 깃발처럼 나부낀다

금세라도 터질 듯

가득 차인 스트레스 저만치서

펄럭이다가 아득히 사라지는데

아슬아슬한 언쟁 후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

텅 비어가는 어느 때쯤

분노는 사그라지고

도심의 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풍선 하나만큼의 빈자리가

견고한 뼛속으로 느껴진다

터뜨려 가벼워진

내 좁은 마음의 모퉁이에

오랜 적막 깨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물감보다 더 진한 채색의 풍선 되어

한 줄기 바람에 날아간다.

 

 


 

 

김임백 시인 / 부화를 꿈구며

 

 

새벽이슬에 젖은 나팔꽃

햇살로 망울 털고 있을 때

막 알에서 깨어난 나비

창공으로 떼 지어 날아오른다

저 나비 떼 좀 봐

나도 나비처럼 부화하는 거야

은하수 넘실대는 밤이 되어서야

고요로 언어를 쏟아내듯

나비 되려는 몸짓!

어둠 속에서 막막한 고뇌

가슴으로 부딪치고

머리로 들이밀어 볼까

돌풍 불어오는 황야에 서서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오듯

한 꺼풀 벗긴다는 것은

통증을 자초하는 것

언젠가는 샛별 되어

강가에서 횃불 흔들겠지

 

 


 

 

김임백 시인 / 나도 봄이면 안 될까

 

 

봄은 싱그러운 천국

 

녹색의 잎사귀 그러하고

 

이파리에 숨어 사는

 

바람소리 그러하고

 

물소리 닮아 맑은

 

당신의 목소리 그러하다

 

풀잎 사이로 햇빛 흘러내리고

 

아카시아꽃으로 은은하게

 

세상 덮는 오월

 

걸어나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김임백 시인 / 상생(相生)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속울음 삼키던 폐타이어 하나

달리는 자동차 바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한때는 저렇게 달렸지

겁 없이 담벼락이나 시궁창을 들이박고

전치 3주의 진단 받아도

오직 질주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날들

일생을 아스팔트에 바치고

평생 속도에 지친 몸

때로는 마음 속 묻어 둔 내일의 희망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었다

영혼의 궁핍 속에서

가슴 한쪽만 가지고 살아온 날들

폐타이어 틈새로 고개 내민 민들레꽃 한 송이

이제 나랑 놀자 하며

환한 웃음 머금고 손 내민다

비가 오면 두둥실 나룻배 띄우고

바람 가득 찼던 허황된 꿈마저 비워낸 채

오직 내 한쪽 팔 늘어지고

내 등뼈 휘어져 쭈그리고 앉아

오로지 미쳐버린 불사조처럼

아직 남은 온기로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 키우고 있다

 

- 시집 『부화를 꿈꾸며』(해암, 2019)

 

 


 

 

김임백 시인 / 겨울 담쟁이

 

 

무엇을 얻으려고 안간힘 썼던가

겁 없이 훌쩍 담장 뛰어넘으려 했지만

더는 디딜 곳 없는 허공 아득하여라

여린 발가락 움직여

담벼락 오를 때 부풀었던 꿈들

보란 듯 꼭대기에서 짙푸른 빛으로

담장 너머 먼 세상 거머쥐려 했건만

축대 벽에 붙어 수맥은 마르고

팔다리 떨려도 힘차게 오른다

바람이 살갗 스쳐 지나가

핏기 마른 가슴 바싹 움츠려든다

이슬처럼 머물다 사라질 몸

분별없이 천하를 내 것인 양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교만했던 지난 날

한 마음 가슴으로 삼키고

담벼락을 움켜쥐고 기댄 채

땅속 깊은 곳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월간『우리詩』 2020년 02월 380호에서

 

 


 

김임백 시인

1962년 경주 출생. 필명: 김설아. 동아연합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한국시낭송회 주최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수상. 호미곶문화예술제 시부문 장원, 백산여성문예상 시부문 수상. 통일부장관상 문학부문 대상 수상. 시집 『햇살 비치는 날에』 『부화를 꿈꾸며』 외 공저 다수. 한국문인협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달성문인협회 회원. 한국 시낭송가로 활동. 현재, 대구시인학교 홍보부장. <사림시>, <쪽빛> 시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