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창준 시인 / 수어로 하는 혼잣말
나는 여길 보라고 했는데 당신은 단지 듣겠다고 했다 내 숲에서 새들은 울음을 잃고 바람이 서걱거림을 지워서 억새는 단지 몸짓만으로 표현될 뿐이다 울음은 갈잎 같은 마음을 한번 더 쥐어짜 보는 일 눈물은 어떤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가 나는 간절하게 떨었다 건기의 초식동물처럼
밤이 되면 나의 수어는 사라진다 돌아선 당신의 등처럼 홀로된 말은 부지런히 이어지는 춤 점자를 더듬듯 당신의 얼굴을 만지다 잠들고 싶었다
휘젓는 손의 동선들을 따라 공기중에 찍히던 방점과 따옴표들 움악이 없는 세계를 나는 살고 싶어요 내 표정을 보세요 웃음과 울음의 입 모양은 다르지 않은 것을
나의 말은 늘 무릎을 꿇고 있고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당신을 웃으며 하현달 같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정창준 시인 / 서커스
아직도 믿는가. 고단 없는 아름다움을. 불우가 결여된 화려함을.
어린 견습생들이 손가락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어린 소녀들이 죽음을 통해서만 고단한 삶으로부터, 폭격으로부터 해방되는,
친구의 하나뿐인, 착한 오빠가 자살을 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또 다른 친구가 그 시신을 수습하게 하는 이 세계를.
그리고 당신의 자리가 무대가 아닌 객석일 것이라는 착각을.
-시집 <아름다운 자> 파란출판
정창준 시인 / 골리앗크레인
-모든 선들이 점의 집합이라는 사실,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우리.
저것은 솟대, 납작하게 엎드린 세계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수직으로 뻗어오르는, 수많은 희망들 중 단 하나만 남을 때까지 깍아 내고 지워 내야만 비로소 드러나는, 저 가 장 절 실 하 고 깨 끗 한 희 망 수평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몸소 허공에 맞서 더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기 위해 공중에 스스로를 매달아 견뎌내는 단 하나의 새, 혹은 점.
정창준 시인 / 안개
머무르지 말자 작은 바람에도 몸을 다치는 우리의 몸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무겁고 쓸쓸한 몸을 이끌고 축축히 젖은 아침을 헤매다 보면 우리가 아는 자작나무는 왜 한결같이 창백한 얼굴로 선잠이 드는지
당신, 당신을 향한 슬픔의 폭과 깊이가 제 몸을 키웠지요 너무 큰 가방을 매고 떠나는 길은 왜 항상 이른 새벽에 이마를 맞대고 있는지 당신으로 인해 불우한, 그래서 눈물이 내 형체인 나는 또 얼마나 당신의 목덜미를 부비며
부창부수(夫唱婦隨)가 꿈인, 모든 상사(想思)의 일이 그렇듯 낡은 현악기처럼 엄살이 몸인 우리 다시 어느 물가로 돌아가 부은 발을 적시며 스며들어야 하는지
정창준 시인 / 크림이 듬뿍 올려진 케이지
백색의 케이크 위에 다리 저는 소가 서 있다. 유방염을 앓고 있는, 한 번도 자신의 새끼에게 물려 본 적 없는 젖꼭지가 부어 있다.
축사의 바깥은 정말 위험한가요? 유착기처럼 달려드는 아침으로부터 우리는 모두 얌전히 갇혀 차라리 구제역을 기다리고 있어요. 종일 움직이지 못한 탓에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살덩이들이 흘러내려요. 달려 본 적 없는 몸으로 도망도 갈 수 없어요. 하늘은 어떤 색인가요? 백열등처럼 흰색인가요? 꽃에서도 소독약의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죠? 언제쯤 죽을 수 있나요? 얼마만큼 젖을 짜면 하늘을 볼 수 있나요? 사료를 우유로 바꾸는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개량되어야 하나요?
저길 봐, 아무도 너희를 짐작할 수 없도록 반듯하게 썰린 저 살덩이들을.
-시집 <수어로 하는 귓속말>에서
정창준 시인 / 영종도
1.
가을, 나는, 자박자박, 후회를 읽으며 그곳에 다녀왔다.
2, 3.
섬이 아닌 그곳에는 반백이 된 선배가 방 하나를 가지고 산다. 시간이 게으르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를 만나러 갔다. 십칠 년 만이었다. 구읍뱃터 어시장에는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고 바람은 기억의 살갗 위에 쌓인 먼지를 쓸어 내고 늙은 호객꾼만 우리를 반긴다. 동석한 늙은 후배는 자신의 지병과 벌이를 번갈아 가며 고백했다. 반백의 선배는 조금도 쓸쓸해 보이지 않고 그렇지만 쓸쓸해진 나의, 늙은 손에 대해서 말했다. 몇 점의 회만 우리 사이에서 싱싱했다.
형, 그날 나는 염부(鹽夫)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서서히 소금이 정제되는 과정 속에서 삭아 가던 염부의 거친 손의 내력에 대해, 우리가 정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잘게 썰린 한 점의 개불을 씹는 시간만큼만 우리의 기억은 호명되고 나는 자꾸만 기억의 찢어진 페이지를 찾아 뒤적거립니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도 되지 않았을 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당신을 만나 어떤 말을 더 해야 할까요. 염부가 오래 기다렸을 결정(結晶)은 사실 침전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증발의 시간을 기다리는 염전의 바닷물들을 함께 보러 가자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비가 내렸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기)단지 나는 조금 더 정의롭고 쓸모 있고 싶었습니다. 훔쳐보았던 당신의 시를 이제 당신 대신 나만 기억합니다.(기)
4.
우리는 이제 늙은 손 대신 저녁과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우리가 더 다가서서는 안 됩니까. 울어서도 안 되겠지요. 영종도는 석양을 보여 주는 대신 건물 뒤로 해를 넘깁니다. 그 건물 안에 늙은 선배와 늙은 후배와 늙지 않았으면 하는 여자가 함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얼굴이 절반쯤 남아, 나는 자꾸만 눈이 묽어집니다. 여자의 세월을 대신 늙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린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쓸모없어지거나 지워질 뿐입니다.
1.
돌아오지 못할 곳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영종도의 하늘에 없었던 노선이 하나 사라질 듯 그어집니다. 나는 잠시 눈을 들어 노선의 끝에 있을, 이곳보다 먼 곳의 소년을 생각합니다. 남들이 그러하듯 떠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이었습니다. 영종도는 그런 곳이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돌아가면 환하고 깊은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정창준 시인 / 내가 묻은 세계
세상은 투명하고 긴 유리잔 안에 든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아서 나는 다만, 매끄러운 표면에 묻은 물방울의 표정을 하고 굴절된 내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지.
침묵에는 일정량의 습기가 포함되어 있고 고요히 고여서 언 손을 녹이며 증발의 시간을 기다리고 싶었다.
세상은 뜻 없이 나를 만들었기에 곁에 묻혀 두고만 있었고 입구 대신 유리 벽만 허락해서 바깥에 있는 내 몸은, 쉽게 글썽거리면서 흘러내렸다.
대기는 더없이 뜨겁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세상은 한없이 차가워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 검고 아득한 어둠을 향해 수어로 하는 귓속말을 투명하게 들려주면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유금옥 시인 / 당신의 산 외 6편 (0) | 2025.11.20 |
|---|---|
| 신새벽 시인 / 피아노의 숲 외 6편 (0) | 2025.11.20 |
| 조혜영 시인 / 정신병동 이야기 4 외 6편 (0) | 2025.11.19 |
| 김임백 시인 / 바람이 전하는 말 외 6편 (0) | 2025.11.19 |
| 김생 시인 / 얼음 사진 외 6편 (0) | 2025.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