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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시인 / 영영이란 말의 뜻 -가설무대2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꽁꽁 얼려버린다 숨 거두자말자이제 끝이란 듯 빨리 길 찾아가라며 서슬 시퍼렇다 마지막 인사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상주들은 그의 무대를 빨리 걷어치울 궁리만하다가 망자는 잊어버린 채 국밥 후루룩 마시며 잔치인양 웃으며 손잡고 모여든다 입관, 화장, 뼛가루 묻을 때까지도 영영 이별이무슨 뜻인지 먹먹하다 그 절차 다 끝나야 비로소 그가 없다는 사실, 날을 넘길수록 현실이 다가온다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질 때 매화 꽃소리 죽이고 피어날 때 별리가 나즉나즉 중얼거린다 누구라도, 생이 무대를 떠날 땐 봄눈이 매화 꽃잎 얼릴 때처럼 매섭게 차가워야지, 무대를 빨리 비워줘야지
정숙 시인 / 골목길 ㅡ가설무대6
이제 그림자들만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을까 신작로에는 대형버스가, 택시가 날렵하게 빠르게 달린다고 큰길만 쫓아다녔지 흙먼지와 검은 연기 달게 마시며 내가 한 마당 꿈꾸며 살아야할 무대는 이렇게 곧고, 넓어야한다며 좁은 길 흙담에 기대어 핀 달구벼슬 꽃도 봉숭아도 못 본 척 짓밟고 지나갔었지 밥 때 되면 엄마들이 제 배꼽 줄 부르느라 자야, 숙아, 철이예이 굴뚝에서 장작 타는 연기에 섞인 시든 풀냄새 비웃으며 살아온 길, 칠순이 낡은 앨범을 정리하다보니 그 시절 닿을 듯 말듯 옷깃 스치던 한 머슴애의 가련한 눈망울만 남는다 저 넓은 바다가 아닌 작은 가슴에 기대어 콩닥콩닥 뛰는 심장소리 듣고 싶어 수평선에서 희번덕거리는 까치놀 무렵 이제사 네 그림자를 찾아 나선다
정숙 시인 / 희안한 제비라 카이예-처용아내 3
서방님, 서방님예
외로움이 속 골빙 다 들었어예.
삐속 씨리게 샛바람이 다 들었어예.
여편네들 허전해서예,
고 가슴에 날렵하게 한 마리 제비 키워서예,
그 제비캉 노닥거린다고
또 칼을 빼시겠어예? 우짤랍니꺼예?
퍼뜩이지만예, 볼품없는 우리 여편네들
여왕거치 귀케 모시데예.
고 짜릿한 맛
우째 잊을 수 있을까예?
화투장 공산 달 밝은 밤 즐기다 보이
날 새는 줄 모리겠데예.
희안한,
참 희안한 제비라 카이예.
-시집 <신처용가> 1996 시학사
정숙 시인 / 풋울음 잡다
딸아, 아무리 몸부림쳐도 꽃이 피지 않는다 봄날이 오지 않는다 투덜투덜 꽹과리 장구 깨지는 소리 따라다니지 말아라 한 생이 자벌레 키 자가웃도 못되는데 그렇게 헤프게 울거나 웃어 보내면 쓰겠느냐
놋쇠는 그런 풋울음 잡기 위해 불 속에서 수없이 담금질 당하고 수 천 번 두드려 맞는단다 주변의 쇠와 가죽 소리를 감싸 끌어안고 재 넘어 홀로 핀 가시연의 그리움 달래주는 징이 되기 위해서
그런 재울음은 삶의 고비 몇 고비 넘기면서 한을 삭히고 달래어 흐르는 물살처럼 부드러운 징채로 두드려야, 목으로 내지르는 쇳소리 아닌 이승과 저승의 경계 허무는 울림 징하게 터져 나오느니
비로소 햇살이 그 소리 비집고 들어 네 둥근 항아리 속 그늘진 도화 꽃 몽우리를 햇살로 피워 올릴 수 있는, 시의 참다운 징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
정숙 시인 / 처용아내 2 -벼랑 끝의 꽃
보이소예, 지는예 서답도 가심도 다 죽은 死火山 인 줄 아시지예? 이 가슴속엔예 안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 언제 폭발할지 지도 몰라예. 울타리 밖의 꽃만 꽃인가예? 시들긴 했지만 지도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이라예. 시상에, 벼랑 끝의 꽃이 예뻐보인다고 지를 꺾을라 카는 눈 빠진 싸나아 있다카믄 꽃은 꽃인가봐예? 봄비는 추적추적 임 발자국 소리 겉지예. 벚꽃 꽃잎이 나풀! 나풀! 한숨지미 떨어지고 있지예. 혼차 지샐라 카이 너무 적막강산이라예. 봄밤이라예. 안 그래예?
정숙 시인 / 花蛇登仙 -전등사 3
사랑이란 저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것
천년 시간을 전등사의 서까래 들어 올리도록 발가벗겨 쪼그리고 앉혀진 몸 눈바람이 몰려와 칼끝으로 빗금 그어놓거나 꽃바람이 애무 하다가 찰싹 뺨을 떄리기도 한다 햇발은 그 분홍빛 살결 얼렸다가 녹였다가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법당의 염불 소리는 저승처럼 아스라이 들리고 생밤을 깨물며 돌아다니는 도깨비들과 어울리면서 제 몸에 박힌 가시들을 뽑는다 이 갈며, 알록달록 고운 무늬로 문신을 그려 시시로 풍화되는 몸 길들인다 드디어 몇 천 번의 허물벗기로 거듭 태어난다 나부상의 나무껍질에 갇힌 속 살결 되살아나고 이젠 주모의 솜털 하나하나 눈을 뜬다
추녀 밑 꽃뱀의 전생 모든 인과 벗어두고 지글거리는 지옥의 혀 끊어버리고 한 마리 저승새로 날아오르려
정숙 시인 / 흰 소의 울음징채를 찾아
딸아, 네 몸도 마음도 다 징이니라
한 번 울 때마다 둔탁한 쉰 소리지만 그 날갯죽지엔 잠든 귀신도 깨울 수 있는 울림의 흰 그늘이 서려 있단다
살다보면 수많은 징채들이 네 가슴 두드릴 것이니 봄눈 이기려는 매화 매운 향이 낙엽까지 휩쓸어 가려는 높새바람의 춤이 한파를 못 견디는 설해목의 목 꺾는 울음소리가
이 모든 바람의 징채들이 너를 칠 것이나 그렇다고 자주 울어서는 안 되느니라 참고 웃다가 정말로 가슴이 미어질 때 그럴 때만 울어라, 울고 울어 네 흐느낌 슬픔의 밑뿌리까지 적시도록 징채의 무게 탓하지 말고 네 떨림의 소리그늘이 은은히 퍼져나가도록
눈 내리는 이 밤, 아버지 그 말씀의 거북징채가 새삼 저를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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