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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선 시인 / 외로움이 밥이다
쓸쓸함이 퍼질 때 한 끼의 비가 내려요
그 흔한 이별도 없어 시간마저 멈춘 집
기다림 차려 놓으면 꽃들이 피어나요
뭘 먹고 사느냐고 새들이 물어오면
외로움만 넉넉해 바람을 퍼먹어요
혼자서 먹다만 빗소리 외로움이 밥인 집
-《나래시조》 2023. 겨울호
조경선 시인 / 간격
너와 난 매번 너무 빠르고 너무 느리다
오랜만에 배드민턴 게임을 하면서 서브처럼 안부를 보낸다
탁탁 절묘한 소리에 끌린다
긴 팔을 휘두르며 서로 다른 섬광이 땅에 닿는 것을 본다
공은 깃털을 아무 조건 없이 잔뜩 묻히고 때릴수록 가벼워지는데
네가 나에게 건넨 새는 웃다가 울다가 저쪽으로 날아간다
이대로가 좋은데, 이대로가 아닌데
그래서일까 소문은 예상했던 공간으로 뛰어들기 일쑤다
라인 밖에서 헛손질은 계속되고
우리는 라인 안에서 근친을 확인하다 상대편이 되고 만다
간격이 좁혀졌다 멀어지는 동안
너와 나는 허虛 공을 눈앞에 두고 새를 잃어버린다
한계를 인정하듯 동시에 수건을 던지며 돌아서고
조경선 시인 / 마침내 나무의 본색에 이르렀으니
나는 처음 그가 나무로 집과 가구를 만드는 목수木手인 줄 알았다. 그 다음에는 나무를 깎아 만물의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彫刻家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무를 깎아 이름을 새기는 전각가篆刻家인 줄 알았다. 나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는 나무를 추적해온, 나무의 연대기를 기록해온 나무의 고고학자考古學者였다. 나무의 은밀하고 내밀한 사생활을 염탐하고 정탐해온 밀정密偵이었다. 이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는 마침내 나무로 시의 집을 짓고 시의 형상을 만들고 나무의 연대기로 인간의 연대를 꿈꾸고 나무의 내밀한 세계로 인간의 성긴 삶을 메꾸길 꿈꾸는 시인이었다. 이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본색은 나무의 본색에 이르렀으니 그는 마침내 나무無, 나는 어디에도 없다는, 아무我無였다. 마침내 나무에 이르는 그를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먼 길이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다.
조경선 시인 / 잔칫집
남은 음식 버렸는데 잔칫집이 되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새들이 손님이다 저마다 산동네 소식 오늘만큼 분주하다
잘 차린 집밥이 새들도 그리웠는지 마당 안쪽 파낸 자리 둥글게 모여 앉아 제각기 안부를 물을 때 슬픔마저 정갈하다
새끼를 거느리는 마음이 바빠진다 음식을 먹다 말고 연신 물고 나른다 발자국 무수히 찍힌 어미의 저 몸짓
조경선 시인 / 책이 얼겠다
J시인이 남기고 간 오래된 계간지
어둠에 책이 얼겠다 펼쳐보면 녹을까
글자는 손길이 끊겨 서리처럼 부서진다
어제는 새파란 얼굴 오늘은 늙은 시인
철 지난 목차는 이름부터 골라 읽고
또렷한 은유 몇 마디 아직도 따뜻하다
뜯겨나간 젖은 말 한파는 파고들어
표정까지 갉아먹은 낱장이 된 노랫말
빛바랜 작은 언어들 씨앗 되어 박혀있다
-《좋은시조》 2022. 봄호
조경선 시인 / 회전문
조심스러운 네 앞에서 매번 주춤거렸다
안쪽과 바깥쪽은 뒤꿈치가 우글거렸고 분명히 열려 있는데 닫혀 있는 이승처럼
돌고 도는 미래는 잡아 봐도 미끄러져
수많은 발자국이 쉴 새 없이 돋아났다 투명을 앞에 놓고서 쩔쩔매는 종종걸음
네 중심은 확고한데 나는 자꾸 튕겨 나가
발 빠른 아침이 우리를 잡아둘 때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이 무서웠다
-《시조미학》2023. 여름호
조경선 시인 /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쌓인 게 너무 많아 찾아간 어느 암자 깨끗한 아침을 노스님은 또 쓸고 있다 큰 원을 그려가면서 따라가는 발자국
그것이 길이었을 때 울음마저 사라져 깡마른 뒷모습 빗자루처럼 꼿꼿한데 나는 더 무거워졌다 바람도 멈춰 있다
고요마저 쏠린 자리 쉬시지요 물었더니 지금이 끝이 아니라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말 아직도 남아 있다고
-《시조21》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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