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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기 시인 / 엄마와 곤란
엄마가 나를 낳을때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나를 낳은 후의 기쁨도 나는 모른다
아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고통을 나는 모른다 내가 퇴원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울다가 웃던 엄마의 기쁨을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고통이거나 기쁨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박후기 시인 / 미산
지도 깊숙한 곳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미산이 있다 그곳은 강원도의 내면(內面) 미월(未月)의 사람들이 검은 쌀로 밥을 짓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달빛이 서어나무 소매를 적시는 곳 나는 갈 곳 몰라 불 꺼진 민박에 방을 얻고 젊은 주인 내외는 버릇없는 개를 타이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멍든 개가 물고 간 신발을 찾아 어둠속을 두지는 밤 미산에서는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이 빛난다 *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에서
박후기 시인 / 제석봉에서 이별하다
산처럼 사랑도 오르는 일보다 내리막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죽은 나무들 사이로 당신이 떠난 후 깨닫는다 엎질러진 물처럼 사랑은 발 아래 스며든다 땀 흘리며 묵묵히 오르던 늦가을 벽소령 당신에게 건네던 물과 함께 쏟아진 마음을 다시 담을 수 없었다 물 한모금으로 더운 가슴 적시며 무거운 짐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좁은 외길 함께 걸을 수 없었다 어째서 모든 뒷모습은 눈 앞에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박후기 시인 / 북어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박후기 시인 / 지하철 정거장에서
지하철은 지구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지하철 안의 나는 지하철과 같은 속도로 달려간다 내가 너와 같은 속도로 살아가고 빛과 같은 속도로 죽어간다 다음 생으로 갈아타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출구를 빠져나가는 이생을 향해 나는 지는 나뭇잎 같은 덧없는 손을 흔든다 지하철의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떠다니는 먼지의 밀도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이고 마음과 마음은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보다 멀다 사람들의 얼굴에 열꽃이 핀다 지하철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오도독뼈를 씹듯 온몸 마디마디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지하철은 떠나간다 들여다보면, 그곳은 바람의 하수관 더러운 공기는 희미한 불빛과 뒤엉켜 시궁을 이루며 흘러가고 한번 가슴을 떠난 신음처럼, 지나간 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박후기 시인 / 소금 한 포대
천일염 한 포대, 베란다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누런 간수 포대 끝에서 졸졸 흘러내립니다. 오뉴월 염밭 땡볕 아래 살 태우며 부질없는 거품 도무 버릭 결정結晶만 그러모았거늘, 아직도 버릴 것이 남아있나 봅니다.
치매 걸린 노모, 요양원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멀쩡하던 몸 물 먹은 소금처럼 녹아내립니다. 간수 같은 누런 오줌 가랑이 사이로 줄줄 흘러내립니다. 염천 아래 등 터지며 그러모은 자식들 뒷짐지고 먼 산 바라볼 때, 입 삐뚤어진 소금 한 포대 울다가 웃었습니다.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에서
박후기 시인 / 감기
숙주를 파고드는 병과 누워 함께 약을 먹는 밤은 쓰다
목에 걸린 알약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사람아
물 한 모금 눈물 한 모금 겨우 삼키며 너를 안고 너를 앓는다
누가 내 안에 들어와 기어이 사흘 밤낮을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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