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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애월 시인 / 비슬산 진달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3.
임애월 시인 / 비슬산 진달래

임애월 시인 / 비슬산 진달래

 

 

그리움도 이쯤이면

터져야 하리

한 계절을 참아 낸

인고의 시간들

 

농익은사월 햇살에

몸이 먼저 달아올라

격정으로 줄을 타는

높은음자리

 

생각도 잦아드는

비슬산 능선에서

바람이 만든 벽

그 경계를 지우며

 

잔인한 침묵의

황무지를 깨우려

피 흘리며 목을 놓은

붉은 메아리

 

 


 

 

임애월 시인 / 그런 날

 

 

문득

나무들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날 있다

지은 죄도 없이 깊은 골에 유배되어

선 채로 형벌을 사는 나무들의 창백한 이마가

늦은 봄날 오후 햇살에 견고하게 빛날 때

한번쯤 그 푸른 동맥에 손을 얹어

우주의 핏줄을관통하는 심박수

그 뜨거운순환을 느끼고 싶은 날 있다

아득한 천공에 매달려

한발도 내딛지 못하는 붙박이별처럼

벼랑 끝에 온전하게발목 잡혀버린 날

그의 처절한 자유의지가

하늘로 밀어올린 무수한 잎사귀들

미세한잎맥을 타고 흐르는

어둠 속 뿌리의 절규

간절하게 듣고 싶은

그런 날 있다

 

 


 

 

임애월 시인 / 꽃씨

 

 

봄날의 향기를 버린 꽃이

가을바람 앞에서 머리채를 풀었다

여름 내 붉은 햇살

머물렀던 그 자리

능선을 타고 온 갈바람이

무심하게 훑고 지나가면

생채기로 남는 꽃들의 낙법 너머로

무성하게 흩어지는 풍문들

난기류 속을 뚫고 온 철새의 안부와

간이역을 떠나는 완행열차의 긴 꼬리

비릿한 시간의 접점,그 경계에서

비로소 속눈썹을 내리는

치열했던 한 생의 기억이 내장된

풍경화 한 점

 

 


 

 

임애월 시인 / 제왕나비

 

 

아무도 내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무의식의 지층깊은 곳에서

떠나야한다고

그것이 숙명이라고

희미한떨림으로 수신된 메시지

 

여린촉수의 예감에

긴 그리움을 싣고

가량없이 낯선비행길에 오르면

절제된 날갯짓만이

거친바람을 가를 수 있다

 

스쳐가는 황무지의 밤은

장미의 가시처럼고독했으나

가시에 찔린 내밀한 상처는

차라리 감미로웠다

 

깊은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견고한 금단의 경계를 넘어서면

푸른 잎맥으로 가득 찬

목 빛 맑은 始原의 전나무 숲이여

서러운 날개마다 돋아나는 찬란한 문양이여

 

아무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광활한 제국의 아침을 나는 보았노라

 

 


 

 

임애월 시인 / 그리운 것들은 강 건너에 있다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강 건너에 있다

산 그림자 어룽거리는 강변에서

키 큰 미루나무처럼 강물을 보며 살고 있다

가끔씩 작은새가 물어다 주는 풀잎 같은 안부

찔레향기 같은 풋풋함으로 날아와

가슴속을 휘저어놓고 바람처럼 사라질 때

강가에는 노을이 피었다

그 노을 따라 저녁길을 걷노라면

자박자박 따라오던 어둠의 발소리

그대가 보낸 편지를 온몸으로 읽는 동안은

검은 어둠마저도 따스했다

노을이 시들고 나면 어둠을 딛고 촘촘하게 돋아나는

별들이

강물 위로 날아와 앉는다

조곤조곤 속삭거리는 별들의 이야기를 밤새 듣다가

깜빡 날이 샐 무렵

미루나무 동쪽 가지가 후루루 이슬을 털었다

놀란 새벽새들 하늘로 솟구치고

그대의 연서도 이슬로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은 연둣빛 상처를 가둔 그리움으로 출렁인다

긴 산맥의 능선은 여전히 묵묵하고

그 묵음의 길을 따라 바다로 흐르는 강물

풀향기 짙어지는 계절이 오면

손끝에 닿지 않는 먼 산정의 안개처럼

강 건너 멀리 있는 것들의 안부가

가끔씩 궁금하다

 

 


 

 

임애월 시인 / 히말라야 소금

 

 

히말라야 소금으로 간을 할 때마다

원시의 바다였던 히말라야 하늘빛과

아슬한 벼랑길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는

순례자 야크의 속눈썹을 생각한다

수심 깊은 대양의 사구에서

밤마다 바다가 꾸었던 꿈들은

마침내 하늘 가까운 곳에서

분홍빛 사리(舍利)가 되었다

1억년 시간이 만든 사리를 등에 지고

산맥의 험준한 바람길을 내딛는

야크의 속눈썹에 걸린 새벽달

1억년 전 하늘빛과 1억년 전 바다의 맛

히말라야 핑크소금은

성스러운 경전의 행간 같은 신비함으로

싱겁지 않게, 짜지도 않게 살라고

그 맛을 조금씩 풀어내 준다

 

 


 

 

임애월 시인 / 봄을 기다리며

-2018년 2월에

 

 

허리 시리던 빙점의 시간이

짧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지금 지구가 태양의 어느 편을 지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겠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것들은

어두운 음지의 시간을 기꺼이 참아낸다

건조한 사막길 같은 계절의 끄트머리

남쪽의 어느 야산에서는 벌써

쌓인 눈을 걷어낸 키 작은 복수초가

노란 꽃 두어 송이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낙타처럼 묵묵한 걸음으로 나서는 또 다른 계절

사막에 돋아난 가시풀을 뜯으며 흘린 입 안의 피

그 피를 마시며 거친 사막의 시간을 견뎌내는

낙타의 눈물을 읽은 적이 있다

제가 흘린 피를 받아먹는 한 생(生)이

온통 피울음이었어도 피워낸 꽃은 가시풀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모래폭풍 감돌던 몇 개의 사막을 건너와

새로운 시대로의 이동을 준비하는 지금

높은 산맥의 북쪽 편 그늘에도

오늘은 병아리 깃털 같은 훈풍이 분다

 

 


 

임애월(林涯月) 시인

제주특별자치도 애월읍 출생. 호는 嘉南 본명 洪性烈.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수료. 1998년 《한국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정박 혹은 출항』 『어떤 혹성을 위하여』 『사막의 달』 등. 경기PEN문학 대상, 경기시인상, 수원시인상 등 수상. 전영택문학상. 현재 『한국시학』 편집주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경기문학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