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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우디 시인 / 러블리 바오밥나무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3.
이우디 시인 / 러블리 바오밥나무

이우디 시인 / 러블리 바오밥나무

 

 

마다카스카르 모른다바에 가면

러블리 바오밥나무가 있다

 

하필 아프리카,

태양의 눈빛에 바람도 흘러내리는 곳이지만

어디 사는 누가 누군지 알 리 없지만

누가 누굴 알아본다는 것은

아름다운 모의(模擬)

 

이런 사랑 앞에서 태양인들 뜨겁지 않겠니,

바오밥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의 입술처럼

연서를 주고받는다

 

사랑은 달다, 벌서듯 증언하는 입술 앞에서

차마 돌아서지 못 하는 나의 사랑은

열매일까 꽃일까,

 

그늘도 모르면서

나는 언제나 열매를 소망했지,

오지 같은 그늘이 무단횡단하는 오후

그 너른 그늘을 누구에게 분양했는지

바오밥 나무를 추궁한 적 있다

 

남편의 스마트폰에서 바오밥 향기 난다고

악담 퍼붓는 바람 아니어도

미용실 한쪽 구석에 걸려 있는

'크림트의 키스'를 볼 때마다 슬픔과 뜨겁게 입 맞추는

나의 전생을 확인한 적 있다

 

아름다운 연인보다

밥공기 먼저 떠올리는 생각 속

'크림트의 키스'를 한번쯤 불러내고 싶은

러블리 바오밥나무가 있다

 

지난 계절이 낙엽처럼 울어도

사랑은, 달다

 

 


 

 

이우디 시인 / 2막 1장

 

 

시작은 덜컹대는 침묵이었어요

관계는 소란했지만

우리 앞의 강물은 멈추지 않았어요

청평 설악호텔에서 깨어난 강변의 아침

창호지 문을 밀어내는 햇살이 나를 건드렸어요

선명해진 생각이 문을 열자

탄성이 찾아왔어요

이부자리까지 중얼중얼

들어오는 햇살이 나를 통과한 순간

얼음 품은 맥주 생각이 났어요

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영화보다 진실한 풍경 속에서 기다림이 궁금한 내가,

문득 추운 내가

얼음이 되고 싶었어요

한 잔이 한 병으로 한 병이 두 병세 병으로 가는 동안

햇살이 부끄럽긴 해도 뭐, 어때요

한 사람이 돌아오는 시간은 아름다워요

 

오래전 나를 결정한 아침이 있었어요

아델(Adele)*의 숨소리 요동치는

콘솔 위, 부루칸테 꽃잎 테두리 붉은 줄을 읽다가,

그날 붉은 한 줄 들여다보다가

서두르지 않고 따뜻해져요

 

창 밖은 그때, 우리 관계처럼 소란하지만

자동차 소리 빗소리 아침이 붐비는 소리

개평처럼 흐르는

내 안의 흥얼거림까지

청평의 기운이 강물처럼 흘러요

추억은 가끔

허기를 달래기도 하나 봐요

 

당신을 써야 할 이유가 빗소리를 적셔요

 

*영국 가수.

 

 


 

 

이우디 시인 / 슬픔의 장례 의식에 대하여*

 

 

 비밀은 구석을 좋아한다

 

 햇살이 오늘을 굴릴 무렵

 이슬 달고 온 슬픔이 슬픔에게 인사한다

 

 잠자는 땅* 그 너머 온, 하얀 슬픔

 안개 뎝석거리는 불곰의 서식지에는 혀가 없어

 불을 삼킨 눈동자로 온다

 자작나무의 흰 몸피 뜯어 먹으며

 기적 소리 밟는다. 갔다

 

 툰드라 눈보라가 콘트라베이스를 켠다 한 권의 매혹 안쪽으로 몇 개의 별을 건너듯 갔다 당신, 을 본 적 있었다 이야기에 눈을 묻으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나를 모르고 나는 박달나무처럼 선 채 숨찬 기적의 끝을 뿌리에 숨겨둔다

 

 은여우처럼 낑낑거리다 시베리아산 늑대 주둥이에 붙은 한 잎의 주홍글씨와 몸 바꾸었을까 한 번쯤 혁명의 뒤꿈치 물거나 체 게바라가 되어 바람을 숭덩숭덩 베거나 숱한 정적과 조우하 지 않았을까

 

 - 시를 쓴답시고

 

 낙엽송이 자작나무에 자작나무가 사시나무에 바람은 다른 바람에

 밤마다 어는 붉은 달에 집착하며 젖은 문장을 말렸을까, 감각

 

 '매혹과 슬픔'*에 하얀 나비 한 마리 앉는다

 

 조연은 주연의 역할에 무난하지 않지만

 시베리아를 읽는다

 

 -모국을 줍는 것이다 모음을 움켜쥐는 것이다

 

*시베리아는 타타르어로 시비르'로 잠자는 땅이란 뜻(최선. '매혹과 슬픔'에서)

 

 


 

 

이우디 시인 / 기억의 속도

 

 

 해가 바뀌고 달은 묵묵히 지나갔지

 

 삶은 실험실 구석을 사는 일인 것만 같았지 주목받지 못한 계절을 살았고 규칙은 성립되지 않았지 무덤덤한 유년을 거치고 당연하지 않은 싱싱 한철이 빛의 속도로 지나갔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소환한 기억 한 줄

 

 초여름 비, 만 겹 주름 다림질하며 내빼는 구급차 소리에 오늘의 잠은 벽에 부딪쳤지 몇 해 전 시모와 한솥밥 먹을 때 말이야, 쫄깃하게 벼려졌던 심장은 어느새 무장해제 되었는지 익숙한 듯 돌아온 어느 순간이 예기치 못한 소름 돋는 기억의 돛을 끌어내렸지

 

 모든 마지막 별이 돌아오는 방식은 뜬금없고 진저리나게 어긋나던 감정 어디 그리움이 자라는지 네모난 서러움에 눈물 났지

 

 여름과 겨울이 교류한 기억은 없고 갑작스레 일정은 잿빛 노을 앞에 멈춘 오늘, 아무나 아무거나 별거 아니란 듯 이치를 외면한 항법 앞에서 느려터진 적막을 샀지

 

 잊고 싶은 것들이 돌아오는 환한 새벽 창밖의 폭우 때문이라며

아직 못다 한 말 있는 듯 우묵한 미안, 한 움큼 남긴 채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을 묻는 눈빛만 켜졌다가 꺼졌다가….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이우디 시인 / 안개

 

 

살 속으로 스며드는 이슬이 있다

물색없이 수줍은 울음의

뒤켠

 

흩어지는 꽃잎들

 

포클레인으로 파헤친, 단지 낡아 더 슬픈 것들

 

찰나의 접속으로 푸른 허공 깨문 듯이

바람의 눈빛 지나간 자리

눈물은 수치

희푸릇 번지는 어둠의 무렵

 

흘러내리는 살빛 너머 영원으로 가는

 

낱섬들

 

마주하지 못할 순간들이 소복하고 소복하다

 

 


 

 

이우디 시인 / 바람개비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혼동하지 않는다

 

 

바람이 온다

머리 한올이 돌기 시작한다

발밑에 누워있던 강아지가 돈다

잘린 가슴 한쪽이 회오리 친다.

피가 돈다

컹컹컹컹, 깃발처럼 펄럭이는 개 짖는 소리

바람은 엄숙하지 않아

우린 쉽게 돈다

네게로 가는 편서풍에 키스하는 문장,

남은 가슴 한쪽 속달로 보내 놓고

밤비처럼 운다

빈 가슴 가득 울먹이는 물음표를

꼭꼭 씹어 먹는다

엉성하게 증류된 나를 마신다

여기 어딘지

눈시울 붉은 달이 운다

촛불처럼 운다

 

밤, 비(悲)는 소각한다

 

이별이 보통인 이 별의 아름다운 날개는 사라지는 중이다.

 

 


 

 

이우디 시인 / 어떤 가을비

 

 

가을비 소리에

이틀을 늙는다

가을비 맞으며 길을 걸으면

사흘을 더 늙는다

그 소리 마음에 담아두면

나날이 쇠잔해진다

살을 바르고 뼈를 깎는다

그래야 튼튼해진다

투자도 이익도 노동도 정치도 없는

하강의, 그것밖에 모르는 가을비

나무들이 겨울의 방향을 가리킨다

중지(衆智)를 모아 깊은 곳에서

서로 만난다

결국엔,

나무는 숲을 모르고

숲은 나무를 모른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이우디 시인 / 공부한다는 거

 

 

가을비에 몰래 우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

죽은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가능할까만, 아름답기로 했다

남루했으나 결기(結氣)의 어제는 가고

기약 없는 오늘로

내일을 부추기며

어깨를 툭,

살아야 사는 것이라 한다

독한 가을비에 삶을 희석한다

 

 


 

이우디 시인

서울에서 출생. (본명: 이명숙)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4년 《시조시학》 신인상. 2019년《문학청춘》시 등단. 2019년 《한국동시조》 신인상. 시조집 『썩을』, 현대시조100인선 『강물에 입술 한 잔』 『튤립의 갈피마다 고백이』가 있음.  시집 『수식은 잊어요』,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