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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원철 시인 / 그 길목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3.
신원철 시인 / 그 길목에서

신원철 시인 / 그 길목에서

 

 

함성과 비명, 피비린내는 가라앉고

주검이 널렸던 나지막한 이 골짝의 역사

공주에서 부여로 통하는 우금치골

도대체 어디로?

분노에 떨며 솟아올랐던 호미, 낫, 쇠스랑, 대나무 창

 

회오리치던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들의 주먹이야 바위를 치는 계란

여기를 빠져나갔어도 어차피 죽음이 기다렸을 거라면

떠도는 혼백들에게 위로가 되랴

 

너무 몰랐다

안방에서만 큰소리치던 권력자들도

운명이라 체념하던 천한 것들도

 

좁혀오는 그물에 갇혀 파닥이던 물고기

방향도 모르고 내달리던 울분.

 

-시집 『동양하숙』 (2019 서정시학)

 

 


 

 

신원철 시인 / 골절

 

 

서울고 출신 홍노인,

멀쩡한 직장 던지고 바람 따라 건너왔다가

사고를 만나 정강이가 부러졌다

몇 번의 수술에도 붙지를 않아

골절용 구두를 신고도

워커를 짚어야 한다

 

마침내 마누라에게마저 버림받은

뼈만 앙상한 다리

점심은 건너뛰고 책만 읽는다

20년 전 꿈을 밟았던 이 땅에서

인생도 골절되었다

 

대머리에 수염이 길어 할아버지 같지만

기껏 나보다 5세 연상

잠깐씩 부끄러운 듯 고교시절을 얘기하다가

남들 두는 장기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먼 하늘에 시선을 주는

 

-시집 『동양하숙』 (2019 서정시학)

 

 


 

 

신원철 시인 / 산 그림자 물에 비치다

 

 

 궁예의 울음소리 쩡쩡 울렸다는

 명성산(鳴聲山),

 그 눈물 흐르고 흘러 호수를 만들었나?

 산도 허리 한 번 크게 비틀었으리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보트의 페달을 밟는다 해는 끄덕이는 백조의 대가리에 얼비치고 산 그림자 물에 흔들린다 흔들흔들 하나씩 솟아오르는 혼백들

 

 포악하던 기세도

 배반의 칼날에

 힘없이 스러져 갔다던가

 짐승의 울음소리 잔잔히 어려 있는데

 

 어깨에 슬쩍 기대오는 왕비의 머리채, 뒤에서 깔깔대는 두 왕자, 순간 그 웃음 비명으로 찢어지고 산과 물이 크게 흔들리고 흔들리고……

 

 찢겨죽은 가족들 이야기는

 서편 하늘에 핏빛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집 『노천탁자의 기억』 (2010 서정시학)

 

 


 

 

신원철 시인 / 방문

 

 

집 앞의 수락산 등줄기를 따라

요란하게 흔들리는 숲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

 

목마른 땅이 젖어드는 날

푸시시 솟아오르는 아내의 부추전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하더니

밖에선 요란하게 비 떨어지고

안에는 노릇노릇 피어오르는 고요

 

시가 찾아오던 어느 날

 

 


 

 

신원철 시인 / 나나이 박물관에서

 

 

곰을 좋아하고 호랑이를 때려잡던 종족

짐승가죽 옷을 걸치고

하늘을 향해 온몸을 떨며 춤을 추는

광대뼈가 강한 넓은 얼굴

 

겨울이면 오줌이 떨어지면서 얼어붙는 땅

눈 덮인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고

얼음이 떠다니는 흑룡강에서 대어를 낚고

초원에서 늑대를 뒤따라 잡고

배가 부르면 천지가 들썩여라 춤판을 벌이다

지치면 벌렁 누워 콧노래를 흥얼대던

원시의 에너지

 

여기서 노니시던 단군 할아버지는

백두산으로 내려가 후손을 만드셨지만

 

하여 긴 다리, 갸름한 얼굴에 물들인 머리칼

세계를 뛰어다니며 춤추고 노래하는 방탄아이들

흰둥이 검둥이 할 것 없이

떼 춤판을 벌이게 만들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꼼짝없는 나나이일세.

 

-시집 『동양하숙』에서

 

 


 

 

신원철 시인 / 산타루치아

 

십자군의 끝없는 전쟁과 혼돈의 지중해

이탈리아 남자들은 항구를 박차고 바다로 나가며

밤하늘을 향해

목 놓아 이 여자를 불렀다

-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 달처럼 둥글게 피어오르던 복스러운 얼굴,

억센 사내들이 목청껏 불러대니

부드러운 손을 뻗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었다

보석과 금화가 굴러다니게 된 뱃사람들의 도시에서

빵과 거처와 여자까지 넉넉히 제공하자

배고픈 천재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어 횃불처럼 타올랐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갈릴레오

밤하늘 별자리로 영원히 반짝이게 되었다

​​


 

 

신원철 시인 / 상처의 층

 

아리조나의 불볕 아래

띠를 두르고 층층이 쌓인 땅의 울음소리

대추장 제로니모, 시팅 불, 크레이지 호스, 수우, 나바호

모두 어디로 갔나?

검연쩍게 웃으며 공예품을 내미는

원주민 여인의 뒤로

석양을 드리우는 그랜드캐넌

 

 


 

신원철 시인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2003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 『나무의 손끝』 『노천 탁자의 기억』 『닥터 존슨』. 저서 『현대미국시인 7인의 시』『역동하는 시』. 현재 〈다층〉 동인이며 강원대학 삼척캠퍼스 영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