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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용 시인 / 원형 탈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이승용 시인 / 원형 탈모

이승용 시인 / 원형 탈모

 

 

몸이 놀랬다

 

수없이 그리다 만 얼굴인 듯

꿈에서 만난 얼굴인 듯

 

놓을 수 없는 기억 숱하게

발버둥 쳤던 흔적

몸도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밤을 설쳤던 한 겹의 잠과 뒤척임 사이

발라드 소절마다 아파했던 울음사이

시선이 멈추던 가로수 사이

어디서도 만질 수 없는 당신

 

끝내 어디선가 숨어 기억하고픈

미련의 꽃자리인 양

마침내 뿌리마저 놓아버린 듯

당신 빠져나간 긴 꿈

 

 


 

 

이승용 시인 / 번지점프

 

 

떨어지는 맛을 봐야 세상을 안다

바닥까지 치고 올라오는

공포에 맞서야 쫄깃한 세상을 본다

감당할만한 고통의 끝이 어딘지

온전히 나를 내어 맡기는

체념의 자리에 가봐야 세상을 안다

어긋나 아팠던 날들이

제자리를 헛돌아도

무게는 이미 허공의 것

중심 잡을 때를 기다려 볼 일

맞장 뜨는 마음가짐으로

내 몸 아닌 듯 멈춰질 때까지

던져보면 알 수 있을 삶의 무게

다시 사는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내가

허공을 뒹굴다 멈춰진 중심

 

 


 

 

이승용 시인 / 만일

 

 

만일의 힘을 아는가

 

만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이해 없이 보내드린 내 아버지께

용서의 시간을 가지러

만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여자였던 한 순간을

다시 올 당신과 여자로 살리

만일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어린 날 나의 무지를 탓하며

처음으로 돌아가리

이 같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지금 이 순간 영원한 현재로

내 마음 밝아져 행복하지 않겠는가

마법의 언어 만일

 

-시집 『꽃이 피다』 《토방》에서

 

 


 

 

이승용 시인 / 사람과 집

 

 

살아봐야 알지

 

볕이 잘 드는지

바람은 잘 통하는지

새는 곳은 없는지

 

공기가 온도가 되고

두 손이 마주쳐 소리 나도록

음악이 되고 춤이 되는 일

 

뜨락의 빨간 국화처럼

서로를 피워 내는 향기의 집

 

둥지를 노래하며

곁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집

 

살아봐야 알지

 

집도 사람도

볕이 잘 드는지

바람은 잘 통하는지

 

-시집 『꽃이 피다』 에서

 

 


 

 

이승용 시인 / 꽃이 피다 ․ 2

-화악花㖾

 

꽃밭 세상에 갇혀

꽃이었던 나를 심는다

꽃을 피우는 일이

나를 피우는 일 같아서

꽃밭에 앉아 잃어버린 나를 가꾼다

적요가 찾아오면 평화의 기운이 넘치고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얼룩을 지워준 손도 내 눈물을 닦아준 손도

꽃들의 손

키 작은 채송화부터 수국까지

연약한 패랭이부터 층층꽃까지

색색의 얼굴이

층층 나타나 수북히 웃어준다

세상 얼굴과는 달라

꽃잎을 바라보며 꽃의 기분을 살핀다

꽃을 받들어주는 화악花萼처럼

세상을 받들어주던 두 손은 나의 화악

꽃밭에 앉아 턱 괴고 꽃이 된다.

 

-시집 『꽃이 피다』 에서

 

 


 

 

이승용 시인 / 안마 의자

 

 

처음 몸을 맡길 때

당신은 꿈속의 멋진 남자

 

우악스럽게 손목 잡혀 본 적 있던

남자의 힘처럼 강하다

 

느슨해진 몸이 두 눈을 내린다

 

소행성을 지나 여기는 별나라

만개의 신경이 줄을 놓는다

 

안팎으로 애쓰던

내 몸 아니었던 몸에게

배려하는 자본의 힘

 

굳어진 두 어깨가 절로 펴지는 일도

굽은 등줄기에 전율이 일어나는 일도

이제야 강을 건너왔다

 

자장가로 들리는 백색소음의 아련함이

닫힌 눈꺼풀 안으로 별들을 불러 모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몸처럼

매달려 살았던 목에서

옭아맨 발등까지

헤쳐 놓은 듯 춤을 추는 감각의 향연

 

감은 눈 속

유영하는 태초의 내가 온다.

씻겨진 내가 온다

 

 


 

 

이승용 시인 / 갈담리 처녀

 

 

유월이 주는 차분한 저녁위로 부는 바람

낯선 공장 지나 낯익은 느티나무 지나

반갑게 길을 내는 연두빛이 환하다

깊은 곳에 숨어사는 갈담리 저수지

일몰처럼 스러지는 친구의 영혼 같다

 

힘을 낼수록 역광으로 뻗치던 오기로

사그락 사그락 스스로 상처 내는 줄 모르고

더 깊은 그늘로 눕던 병자의 처소가 있던 자리

물러설수록 벼랑에 매달려 길이 되지 못하고

습관이 된 낡은 오후만이 몫이었던 그

 

뒤집어 보면 뭐라도 나올까

우물이 된 의문들 수북하게 쌓여갈 뿐

누군가의 죽음이 위로가 되던 날이 있었지

훠이훠이 바람 한 번 불면 넘어져 해가 바뀌거늘

잡을 수 없는 건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하자

 

오늘은 여기가 꽃피는 자리

둥글게 펼친 하늘양산 아래

가장자리부터 고요를 말고 가는 주름꽃

어제와 다른 자태로 피어나고 있다.

바닥 다 잠겼는지 흰둥이도 순해지는 저녁

 

 


 

이승용 시인

1963년 강원도 영월 출생. 본명: 이경숙. 숭의여자대학교 응용미술과와 아주대하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락과 졸업. 199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춤추는 색연필』 『꽃이 피다』. 외 테마 시 공저.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가톨릭문인협회.